[Weekend Interview] 칵테일 주조의 선구자..이석현 롯데호텔 수석 바텐더

백상경 2017. 10. 27.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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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도 인생처럼 원샷 없어..음미하며 천천히 한잔
고단하고 지친 삶에 위로의 향기를 선물하는 직업이죠
손님마다 사연 구구절절..노숙자가 와도 물한컵 대접하죠
서울 송파구 시그니엘 서울 81층에 위치한 스카이라운지 바 `바81`에서 30년 차 이석현 롯데호텔 수석바텐더가 3가지 색상의 칵테일을 선보이고 있다. [한주형 기자]
'술에는 영혼이 담겨 있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영혼·정신을 뜻하는 영어 단어 '스피릿(Spirit)'은 위스키, 브랜디 등 증류주 전체를 통칭하는 단어로 쓰인다. 그래서 바텐더들은 믿는다. 술에 담긴 영혼이 마시는 사람의 영혼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줄 수 있다고 말이다. 손님들이 바(Bar)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 조금이라도 기분이 더 좋아지기를. 그 하나의 목표를 위해 기다란 바 테이블 너머에 묵묵히 서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칵테일 한 잔을 내놓는다.

올해로 꼭 30년째 현역으로 바를 지키면서 사람들을 위로해온 이가 있다. 서울 잠실 롯데호텔 시그니엘서울의 이석현 수석 바텐더(55)다. 처음엔 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재즈 음악을 들으며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더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는 그. 바텐더라는 직업 자체가 생소한 시대였지만, 짧은 시간 망막을 스친 당시의 풍경은 스물다섯 살 호텔 웨이터를 국내 바텐더 업계의 대부로 바꿔놨다.

한국바텐더협회 회장이기도 한 그는 '조주학개론' 등 다양한 저서를 펴낸 국내 최고 수준의 주류 전문가다. 어센틱 바(Authentic Bar·정통 고급 바)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호텔 바에서만 30년간 현역으로 자리를 지켜 후배 바텐더들의 '롤모델'로 여겨진다. 이제는 현장을 떠나 직원들만 관리해도 될 경력을 갖췄지만 그는 여전히 손에서 칵테일 셰이커와 믹싱 글라스를 놓지 않는다. 서울 중구 롯데호텔 서울 바의 터줏대감으로 있다가 얼마 전 새로운 도심 랜드마크가 된 잠실 롯데호텔 시그니엘서울의 바로 자리를 옮겼다. 멋들어지게 빗어 넘긴 머리에 구김 없이 단정한 정장을 갖춰 입고 절도 있는 자세로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에선 20대 못지않은 열정이 엿보인다. 이석현 바텐더는 한 잔의 좋은 술이 지친 사람들에게 다음 한 걸음을 내딛을 힘을 북돋워준다고 믿는다. 기쁘거나 노엽거나 슬프거나 즐겁거나 인생은 계속 흘러간다. 그 길에 잠시 들러 목을 축일 바, 그리고 테이블 너머 미소를 잃지 않는 바텐더가 있으면 족하다. 사람들이 절로 찾아올 만큼 좋은 향기를 품은 바를 만들고 싶다는 그를 만났다.

―바텐더는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롯데호텔에 입사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식음료부에서 레스토랑 웨이터로 배정돼 이탈리아 레스토랑 '라 꼬낄라'에서 일명 '딜리버리 맨'으로 근무했다. 음식이나 음료가 나오면 손님들에게 날라주는 역할이었다.

한창 일하던 어느 날, 맞은편 프렌치 레스토랑 '프린스 유진'에서 피아노·바이올린·첼로 3중주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손도 멈추고 쳐다보게 됐는데, 그때 본 바의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멋들어진 정장에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칵테일을 만들던 바텐더의 모습, 정말 멋있었다. 손님들과 편안하게 대화도 하고, 음악도 즐기는 그 모습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난 꼭 바텐더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계속 발로 뛰면서 일하던 웨이터 시절이라 바에서 가만히 서서 일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고.

그래서 군대 갔다가 1987년 호텔에 돌아오면서 바텐더를 할 거라고 우겨서 시작했다. 예전에 웨이터 시절 같이 일했던 선배들이 이제 다 지배인이 됐더라. 그전에 일도 좀 하는 편이었고 관계도 좋아서 다들 '내 밑으로 와라' 했는데, 바텐더 하겠다고 죄다 뿌리쳤다.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사실 문이 참 좁았다. 그때 롯데호텔 본관 레스토랑에 일하던 직원 500여 명 중에 바텐더가 50명이었다. 입사 동기 10여 명 중에 바에 가는 사람이 1~2명 정도인데 아무나 시키지도 않았다. 경쟁이 치열했다. 그래서 생각했던 게 1985년에 생겼던 조주(造酒)기능사 자격증이었다. 지금이야 1년에 여러 차례 시험이 있지만 그때는 한 번 떨어지면 1년을 기다려야 하는 일종의 '고시'였다. 그때만 해도 선배들이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따지 않은 채 활동하는 분들이 많았다. 이거다 싶었다. 1986년에 시험을 봐서 자격증을 따고 나 나름대로 경쟁력을 만들었다.

지금이야 인터넷도 찾아볼 수 있고 칵테일을 배울 수 있는 곳도 많지만, 예전엔 참고할 책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호텔 근무 시절 알고 지냈던 이식이라는 선배를 찾아갔다. 이미 퇴직하고 당시 유일한 바텐더 양성 프로그램이던 두산씨그램 스쿨에 가신 분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귀찮을 정도로 찾아가서 칵테일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한 손 셰이킹, 양손 셰이킹, 술의 특성과 배합 방법, 이런 칵테일의 기본기는 그때 많이 배웠다. 선배들도 많이 도와주셨고, 저도 개인적으로 참 노력 많이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롯데호텔 37층 나이트클럽 '아나벨스'에서 칵테일 대회를 했던 때다. '그래스호퍼(Grasshopper)'라는 청백색 칵테일을 만들어서 1등을 하고 TV프로그램 출연까지 했다. 그런 결과물이 하나씩 모이면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호텔에서 일한 게 계기가 돼 바텐더까지 됐다. 원래 꿈은 무엇이었나.

▷제 고향이 경상남도 거창이다. 시골에선 사실 공부 좀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머리인데, 그때 전 건국대 축산학과를 가서 시골에 돌아와 조그마한 농원이나 목장을 하고 싶었다. 뭐, 노래 가사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게 꿈이었다고 할까. 개인적으로 산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래서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왔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호텔에 입사하니까 전혀 느껴보지 못한 세상이 펼쳐졌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같이 유명한 분을 만나보고 했겠나. 호텔에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분들을 보게 된 것이다.

당시 롯데호텔 4층 수영장 밑에 멤버스 살롱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곳을 오픈할 때 제가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모델을 했다. 거기서 웨이터 일을 하면서 지금은 큰 기업들 이끌고 있는 분들하고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 그러면서 꿈이 호텔 관광업계 쪽으로 차츰 바뀌더라. 내가 생각보다 이 분야 일을 잘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처음부터 바텐더 생활을 30년이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원동력을 꼽는다면.

▷술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더 큰 힘이 되어준 건 아무래도 손님들이다. 손님과 바텐더는 단순히 술을 사고파는 관계가 아니다. 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선 두 사람은 한 잔의 술을 통해 서로 보호벽을 내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 교감하기 시작한다. 지금도 어떤 단골들은 저에게 '바 하나 차려줄 테니 나오라'는 분도 있고, 꽃게철만 되면 같이 꽃게 먹으러 함께 놀러가자고 전화하는 분도 있다. 금융권에 몸담고 있는 한 단골은 명절 때면 직접 떡 선물을 챙겨준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런 사소한 것들이 사람 사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내가 만든 칵테일을 먹고 싶은 사람, 나와 함께 대화하고 싶은 손님들이 있는 한 바를 떠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당신에게 칵테일과 바는 어떤 의미인가.

▷칵테일은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실과 같다. 굳게 닫힌 마음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하고. 애초에 칵테일 자체가 서로 다른 요소들의 '관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제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다양한 술이 바텐더의 손을 거쳐 맛, 향, 색 3가지 분야에서 하모니를 이룬다. 칵테일이 일종의 도구라면, 바는 소통의 장이다. 때로는 공간 그 자체가 중요한 경우가 있다. 칵테일은 원샷이 없다. 바텐더에게 설명을 듣고, 맛과 향과 색을 천천히 음미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게 마련이다. 그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바에서 이뤄진다. 특별한 칵테일을 기억하는 사람보다 특별한 바와 바텐더를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한다.

저는 바가 현대인들의 힐링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손님들과 나눈 대화를 돌이켜보면 개인적인 고민부터 연애 문제, 가족과의 일, 사업상의 어려움까지 정말 세상에 있는 모든 일들을 두고 이야기를 하게 된다.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바텐더, 삶이 힘들 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바가 있다면 인생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래서 후배나 학생들에게 항상 강조한다. '바에는 문화가, 바텐더에게는 향기가 있어야 한다'고.

―바에서 만난 사람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

▷사실 바에서 나눈 얘기, 있었던 일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잊는 것이 원칙이다. 비밀이 지켜져야 바의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다. 그래서 아주 개인적인 기억 선에서만 이야기해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이하 손님과 관련한 내용은 익명으로 처리)

조금 슬픈 얘기를 해도 되나. 제가 대학 강의도 나가고, 책도 쓰고 있어서 교수님이라고 불러주시는 분들이 있다. 저를 알고 저를 존중해 주시는 분들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분들은 더 각별한데, 예전에 한 공기업에서 임원을 하시다가 건설업을 하셨던 분이 있다. 사업도 정말 잘하셨고, 제게도 한국 본연의 문화를 살린 바를 하나 만들어 주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각별한 단골이셨다. 그런데 IMF 사태가 오면서 이분이 굉장히 어려워지셨다. 수도권 신도시에 20층짜리 빌딩을 지었는데 분양이 안 되면서 괴로워하셨다. 언제부턴가 오면 계속 고민을 털어놓고, 고충을 토로하셨다. 결국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바를 찾아 오셔서 여러 말씀을 하고 가셨다. 사채를 쓰셨던 것 같다. 직원들 다 식사하러 보내놓고 혼자 돌아가셨다고 전해 들었다. 30년 바텐더 인생을 돌이켜봐도 유독 그분이 안 잊힌다. 내가 좀 더 좋은 술을 드렸으면, 더 힘이 되는 얘길 해 드렸으면 어땠을까 하고. 참 가슴 아픈 기억이다.

시그니엘 `바81`에서 이석현 롯데호텔 수석바텐더가 칵테일을 흔들어 섞는 `셰이킹`을 하고 있다. [한주형 기자]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바에선 정말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바텐더도 삶을 굉장히 많이 생각하게 된다.

삶을 어떻게 향기롭게 해 나갈까, 돈이 있으면 될까? 단골 손님 중에 벤처기업으로 소위 '대박'을 터뜨렸던 분이 있었다. 부의 상징이라는 강남 타워팰리스도 사고, 정말 돈은 부족함 없이 살아간다. 그런데 가정사가 안 좋아졌다. 결국 이혼을 했고, 지금은 혼자 지내고 있다. 다른 곳에서 술을 먹다가도 밤 12시가 되면 집에 가지 않고 바에 오곤 한다. 대리운전비를 줄 테니 자기랑 술 한잔 하자고. 돈이 전부는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바텐더가 아니었으면 저도 이런 생각 안 하고 그저 돈 열심히 벌어서 흥청망청 살았을 것 같다.

또 하나 기억나는 분이 있다. 어느 날 밤 8시쯤 얼굴에 크게 화상을 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바를 찾아오셨다. 종종 바에 노숙자가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물이라도 한잔 드리고 조용히 나가시게 한다. 그날도 그런 분이겠지 싶었다.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바에 앉더니 맥주를 한 병 달라고 하셨다. 그분이 잔을 못 집으셔서 맥주에 빨대를 내드렸는데, 혹시나 마음에 상처가 될까 싶어 조심히 응대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두 번 정도를 그렇게 오셨는데, 누군지 몰랐다. 알고 보니 유명한 화가였다는 걸 신문에서 뒤늦게 확인했다. 처음의 제 생각이 부끄럽기도 했고, 그분이 좀 애절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다. 모두 바니까 경험할 수 있었던 일이다.

―즐거웠던 에피소드는 없었나.

▷한국시리즈 결승전 출전 팀이 호텔에 묵은 적이 있다. 그런데 경기가 경기다 보니까 감독님과 코치님이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고 있더라. 술도 입에 못 대고 그저 머리만 싸매고 있기에 저도 어떤 말을 꺼내야 이 사람이 좋아할까 고민했다. 예전에 이분이 선수 시절에 보여줬던 플레이를 넌지시 얘기해 봤다. 그리고 그날그날 펼쳐진 결승전 경기를 챙겨보고 주요 포인트를 메모해뒀다가 한마디씩을 건넸다. 그런 얘기가 공감대가 되니까 나중엔 긴장이 좀 풀리는 게 보이더라. 결국 경기 다 끝나고선 술 한잔 드시면서 많은 얘길 하고 가셨다.

호텔 디너쇼에 자주 출연했던 가수 한 분은 꼭 바에 들러 마티니 한 잔을 먹고 갔다. 그분에겐 올리브 10개를 꼭 서비스로 줘야 했는데, 그럼 자기 앨범 CD를 한 장 딱 사인해서 주고 갔다. 호텔에서 드라마 촬영도 많이 하고, 행사도 많이 하니까 연예인 손님들은 많이 봤다.

―이 길을 택한 것이 후회스러운 적은 없었나.

▷지금은 없지만 바텐더라는 직업 자체가 오해를 사던 시절엔 회의감이 컸다. 초창기 우리나라 바 문화가 상당히 왜곡돼 있던 시절이다. IMF 사태를 전후로 '섹시바' '토크바' 같은 유흥업소 바가 난립했을 때가 있다. 얼마나 좋은 술을 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여성이 술을 따라주고 옆에 앉아 있으면 되는 식이었다. 진심으로 술에 대해 고민하는 바, 손님과 교감하려는 바는 발길이 끊겼버렸다. 그러다 일부 잘못된 바들의 행태가 전체의 것인 양 비난을 받을 때는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나' 하는 허탈감이 컸다. 다행히 이제는 그런 바가 거의 사라졌다. 사람들이 눈을 뜬 것이다. 요즘 싱글몰트 위스키 바가 확 늘어나고 있는 건 아시나? 이제 술 자체를 주제로도 대화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문화가 있는 바'의 시대 말이다. 조주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 4만7000명이다. 훌륭한 후배 바텐더들도 정말 멋있게 즐길 수 있는 바를 만들어가고 있다. 외국의 바텐더들도 한국을 찾고, 유학파 바텐더도 늘어났고. 바텐더들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바 문화가 확고하게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바텐더로 일하면서 겪은 고충이 있다면.

▷바텐더 중에서 경찰서 한 번 안 가본 사람들이 있을까. 아무래도 술에 취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니까 처음엔 어려운 게 많았다. 젊었을 땐 한 달에 한 번꼴로 남대문경찰서에서 밤을 꼬박 새워야 했던 적도 있다. 술에 취한 손님이 주정을 부리다가 30만원짜리 테이블을 깨버리기도 하고, 계산을 못할 정도로 인사불성이 되기도 하고. 그럼 그 돈 안 받을 수가 없으니 112에 전화하고 같이 가야 한다. 손님은 유치장 안에서 주무시고, 저는 밖에서 깰 때까지 기다리고. 합의하고 조서 받고 집에 아침 8시쯤 들어가면 자다가 또 오후 3시쯤 출근하고. 그땐 참 힘들었지만 지나니까 추억이다.

―가족들의 불만은 없었나.

▷제가 가장 미안해 하는 게 바로 아내와 딸이다. 바텐더는 직업 특성상 낮과 밤이 바뀔 수밖에 없다. 신혼 살림을 인천에 차렸는데, 잠 한숨 못 자고 첫차를 타고 퇴근하고, 눈 붙였다 다시 출근하는 생활을 한동안 반복했다. 아내와도 많은 얘기를 나눠야 하는데 피곤하다고 자고 그랬다. 지금은 집이 서울이지만 여전히 새벽 3시까진 잠을 안 잔다. 여기에 술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대학원도 다니고 공부도 하고, 심지어 2000년부터는 대학원 강의까지 나갔으니까. 딸아이도 많이 못 봤다. 다섯 살, 여섯 살, 제일 예쁠 때 특히 못 봤다. 그래서 바에 온 손님들 중에 아이 아빠들이 있으면 꼭 얘기한다. 아이는 금방 크니까 추억 많이 쌓으라고. 아직도 딸과 어렸을 때 소양강댐 놀러갔던 게 기억 난다. 함께 놀러간 몇 안 되는 추억이다. 아이가 '아빠 아빠' 하면서 달려오고 제가 꼭 안아줬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남편, 아빠를 언제나 이해해주고 든든하게 지원해줘서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다.

부모님께도 죄송하다. 제가 명절에 내려가기 힘드니까. 부모님은 제가 자라는 동안 학비도 못 주고 알아서 크도록 했기 때문에 저만 잘되면 괜찮다고 하신다. 아버지 연세가 올해 여든일곱, 어머니는 여든셋이라 정말 앞으로 시간이 많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많이 못 뵙고 못 챙겨드려 죄송하지만 아직도 두 분이 손잡고 함께 음식도 해서 드시고, 정정하셔서 너무 감사하다.

―우리 전통주를 활용한 칵테일의 선구자로 불린다.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당시 일하던 호텔 펍 '바비런던'은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펍으로 명성이 높았다. 막 생산된 맥주를 단기간에 입고해서 저온 숙성했다가 내놓으니 퀄리티가 상당히 높았다. 그런데 외국인 손님들이 맥주나 위스키 종류가 아니라 당시 판매하던 '김포 막걸리'를 마신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에서 만든 마티니, 진토닉은 큰 매력이 없었던 것이다. 위스키 같은 것도 내용물은 같은데 더 비싸기만 하고. 한국에 왔으니 한국 술을 마시고 싶어한다는 얘기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 손님 10명 중 2~3명은 메뉴만 보다가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 전통주로 공략을 했다. 생각해보면 현존하는 칵테일 상당수가 각 나라의 전통주로 만든 것이다. 전통주 전문가인 동국대 교수님 밑에서 공부하면서 양조장도 많이 찾아다니고 연구도 했다. 다섯 가지 색깔과 맛과 향을 가진 '오감만족 오향색 막걸리 칵테일'을 개발해 일본이나 홍콩에서도 선보였고, 청와대 국빈 행사에서도 내놨다. 인삼을 활용한 '레드진생', 전통주 감홍로를 활용한 '감홍로 샤워' 등 종류도 늘리고 조주기능사 국가자격시험에도 전통주 베이스 칵테일을 포함시켰다. 앞으로도 우리 술을 활용한 칵테일은 꾸준히 만들고 싶다.

―자신만의 가게를 열 생각은 없나.

▷퇴직하면 내 가게를 차려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체력적으로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해야지. 바를 열더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인간적인 향기가 그득한 바를 만들어보고 싶다. 돈이 없으면 그냥 한잔 내줄 수도 있고, 와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서로 나눌 수 있는 그런 인간미 있는 바 말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하나하나 역량을 모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갖춰졌다는 생각이 든다. 대신 호텔에 고마운 부분은 다 갚고 가고 싶다. 저랑 비슷한 연배의 바텐더들은 모두 현업을 떠났다. 이 나이까지 바에 서 있을 수 있도록 도와준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바가 시그니엘에 열릴 수 있도록 조금만 더 뛰다 갈 생각이다.

이석현 바텐더는

1962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1982년 롯데호텔 식음료팀으로 입사해 군 복무를 마치고 복귀한 1987년부터 바텐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국대 산업기술환경대학원 식품공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잠실 롯데호텔 시그니엘서울의 수석바텐더로 한국바텐더협회 회장을 겸하고 있다. 대한민국 주류품평회 심사위원과 한국산업인력공단 조주기능사 필기 출제위원 등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그가 쓴 '조주학개론(현대 칵테일과 음료이론)'과 '손쉽게 풀어 쓴 양조학' 등 저서는 많은 바텐더 지망생들에게 교과서처럼 여겨진다. 우리 전통주를 활용한 칵테일 주조의 선구자로 꼽히며, 청와대 외교사절단 환영행사 등에서 직접 막걸리 칵테일을 선보이기도 했다.

[백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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