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연금술은 우리의 적
[경향신문]
지난번 낙랑군 위치를 둘러싸고 사이비역사학이 극성일 때 어느 국회의원이 우리나라 역사를 위해서는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단다. 그러더니 이번엔 최고(最古) 금속활자로 기대(?)를 모았지만 학술적으로 아직 확인이 안 된 증도가자(證道歌字)를 놓고도 모 의원이 “국익 차원에서는 당연히 우리가 (진짜라고) 주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우리끼리 쉬쉬하며 최고(最古) 문화유산을 양산해낸다고 무슨 국익이 된다는 걸까. 그러고 보니 황우석 사태 때도 국익을 위해서는 그냥 덮고 넘어가야지 그걸 우리끼리 폭로하냐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35년 제국일본 의회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국체명징(國體明徵·국가의 정체성을 밝힌다)’운동이다. 국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명분하에 국가와 천황에 대한 광적인 숭배열기가 일어났다. 도쿄제대 법학부 헌법학 교수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의 저서 <헌법강화(憲法講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노베는 이 책에서 천황의 지위는 국가의 최고기관이라고 했다. 가장 높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본이라는 국가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누가 봐도 이상할 게 없는 주장이었다. 이 책은 1912년에 이미 출판되어 정부와 사법부가 공인하는 통설의 지위를 누려왔다. 1935년 당시 일본 사회 엘리트들은 대개 이 책으로 헌법 공부를 해왔다.
그런데 돌연 ‘국익’을 부르짖는 일부 의원들이 천황은 국가를 초월하는 존재이지 국가의 한 기관이 아니라는 해괴한 논리로 멀쩡한 학자를 공격한 것이다(이때 미노베는 학문 업적을 인정받아 상원에 해당하는 귀족원 의원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미노베를 ‘반역사상가’ ‘모반인’ ‘학비(學匪·共匪는 들어봤지만 학비는…)’라고 매도했다. 기가 막힌 미노베는 의회 연단에서 논박했지만 이미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 광풍을 견디지 못하고 의원을 사직했고, 테러까지 당했다. 미노베가 무슨 대단히 진보적인 학자도 아니다. 그는 패전 후 맥아더헌법을 비판하고 메이지헌법 유지를 주장했던 사람이다.
또 한 사람이 희생됐다. 와세다 대학의 역사학자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그 역시 천황과 일본의 전통문화에 애착이 깊은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1939년 그가 고대일본의 위인인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고 하여 공격이 시작되었다.
반박할 틈도 없이 저서들은 판매 금지됐고, 대학에서도 쫓겨났다.
1920년대 세계 5강을 구가하며 잘나가던 일본이 1930년대 이후 흉악한 몰골이 된 것은 이와 같은 일들 때문이다. 과대망상, 이게 제국일본을 무너뜨렸다. 사회의 어떤 부분에 성역을 두고 그에 대한 합리적 논의를 봉쇄하기, 큰 목소리로 논리와 팩트(fact)를 깔아뭉개기, 자기 역사와 사회를 무조건 찬양하기, 이런 일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면 그 사회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경계해야 한다.
일제 치하 조선민족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논리와 팩트에 기반하지 않은 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해 작가 상허 이태준은 일갈했다고 한다. “주기율표(화학에서 중시하는 원소 배열표)대로 하라, 연금술은 반대한다.” 역사를 논할 때 입으로는 논리와 팩트를 말하지만, 사실은 연금술을 부리려는 사람들을 가려내야 한다. 조선민족의 위대성을 이태준인들 소리쳐 외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차근차근 주기율표대로 하지 않고 연금술을 부려 ‘민족의 위대성’을 만들어낸다면 그건 환상에 불과하며, 결국 독립은커녕 우리를 더더욱 열등민족으로 내몰 것이라는 차가운 사실을 상허는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연금술은 뚝딱하고 주장하기 쉽지만 논리와 팩트에 기초한 주장을 하는 데에는 품이 많이 든다. 왜냐하면 논리와 팩트에 하자가 있을 경우 그 사람의 신뢰성이 떨어지므로 거듭거듭, 단단히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뉴스 프로그램에 ‘팩트 체크’ 코너가 생겨난 것은 반가운 일이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목소리 큰 사람(언론플레이 잘하는 사람)이 행세하곤 한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단단한 논리와 팩트로 무장한 사람일지라도 큰 목소리 한방에 묻혀버린다. 큰 목소리가 가짜란 게 드러나도 더 큰 소리를 내면 상관없다. 이런 판국에 누가 논리와 팩트에 공을 들이겠는가. ‘아니면 말고~~’는 퇴장해야 한다.
예술이나 신앙에서는 연금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에서는 아니다. 역사는 과거의 현실에 맞닥뜨려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그걸 대하는 우리들의 역사인식은 현재와 미래의 현실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친다.
제국일본은 키 작은 한 청년 히로히토를 ‘살아있는 신(現人神)’으로 만들었고, 주체조선은 어디서 갑자기 우주도시 같은 ‘단군릉’을 창조해냈다. 둘 다 연금술이었다. 그 둘의 말로와 현실을 보라. 우리의 국시는 논리와 팩트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저 둘과 다른 사회인 것이다. 우리를 저 둘처럼 만들려는 연금술사를 경계하자.
<박훈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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