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각도기 잘 챙기라"..진화하는 '악플러'
“10년을 참았습니다.”
지난 12일 방송인 정준하(46)씨가 최근 자신에 대한 비방과 욕설이 잇따르자 ‘악플러’들에 대한 대대적인 고소를 예고하며 이같이 말했다.
하지만 온라인에선 정씨에 대한 비방글이 수그러들기는커녕 일부 네티즌들은 “각도기를 잘 챙기라”는 당부와 함께 오히려 교묘한 악성댓글을 쏟아냈다. ‘각도기’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형사처벌을 받지 않을 정도의 수위’라는 의미로 쓰이는 은어이다.
온라인 댓글 관련 형사 고소가 폭증하면서 네티즌들의 대응 또한 교묘하게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형사처벌 수준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악성댓글이 잇따르면서 피해자들의 속앓이가 더욱 깊어가고 있다.
◆연간 1만5000건… ‘대고소 시대’ 도래
24일 경찰청에 따르면 2012년 5684건이던 사이버 명예훼손·모욕 사건은 2015년 1만5043건으로 3배가량 늘어난 후 지난해 1만4908건을 기록했다. 올해는 지난달까지 9760건이 접수됐다.
명예훼손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처벌할 수 없고 모욕은 고소가 있어야 수사를 할 수 있는 범죄임을 감안하면 악성댓글 관련 고소가 수년새 폭증했다는 얘기다. 바야흐로 댓글 관련 ‘대고소 시대’가 열린 셈이다.
경찰 관계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용이 늘어나 일반인에 대한 사이버 폭력이 크게 늘어나고, 과거와 달리 무시하거나 참기보다는 처벌해야한다는 정서가 형성됐기 때문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미지 타격을 고려해 꾹꾹 참아왔던 연예계 등이 과거와 달리 형사 조치를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선처하던 관례가 사라진 점 등도 ‘대고소 시대’의 주된 배경이 되고 있다.
온라인상의 각도기 댓글. |
◆수사경험·노하우 쌓여 등장한 ‘각도기 댓글’
이처럼 댓글을 둘러싸고 고소가 급증하는 것에 비례해 네티즌들의 악성댓글도 더욱 교묘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각도기 댓글’이다.
“눈치도 없고 건방지고 할 줄 아는 건 먹는 것밖에 없는.....나는 죽어야겠다”거나 “읍읍(입을 막고 욕을 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성어)” 등 실컷 욕설을 하고 나서 마지막에 ‘내가 그렇다’를 덧붙이거나 욕설 대상을 ‘그 XX’ 등 모호하게 쓰는 방식, 신조어를 만드는 방식 등이 대표적이다.
일부 네티즌은 모스부호 변환기나 아랍어나 중국어 등 외국어 번역기를 이용한 악성댓글도 구사하고 있다. 네티즌들은 이같은 수법들을 모아 ‘고소당하지 않는 법’이라며 서로 공유하기도 한다.
더구나 각도기 댓글은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란 잘못된 믿음을 주면서 유명인을 상대로한 가학적 조리돌림 놀이로 정착할 기미마저 보이고 있는 데다, 형사처벌을 염두에 두면서까지 악성댓글을 달고 있단 점에서 문제란 지적이 강하다.
대중문화평론가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악성댓글이 줄지 않는 것은 청년층이 분노를 풀 곳이 온라인 밖에 없다는 얘기”라며 “여가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이같은 ‘주목 경쟁’은 형태를 달리해 계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늘어나는 형사처벌의 반작용으로 네티즌들이 자신의 수사경험이나 노하우, 요령 등을 공유하면서 악성댓글을 더욱 발달시키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 교수는 “악성댓글의 진화는 수사경험 등 네티즌들 사이의 정보축적의 결과물”이라고 진단했다.
◆법조계, “형사처벌 가능해 주의해야”
하지만 “형사처벌을 피할 수 있다”는 네티즌들의 생각과 달리 법조계에선 ‘각도를 잰’ 악성댓글들 역시 처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설령 비방 주체를 명시하지 않았더라도 제3자가 보았을 때 누구에 대한 비방글인지 객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다면 처벌의 대상이란 것이다.
이율 대한변호사협회 공보이사는 “포장을 어떻게 했든지 네티즌들 사이에선 누구를 욕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는 내용들”이라며 “외국어나 모스부호를 이용하더라도 누구나 쉽게 번역기 등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문제 삼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모욕죄의 특성상 공연성과 피해자의 모욕감 여부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요령을 쓰면 법망을 피할 수 있을 것’이란 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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