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0시간 넘게 집게로 핵연료봉 치웠다
[한겨레21] 원전 노동자 66%가 비정규직·협력업체 직원…
비정규 직원 10명 중 7명 ‘방호·방재 매뉴얼 모른다’
“기자님, 안녕하세요. 타지에서 너무나 고생이 많으십니다.”
낯선 이름의 남자에게서 어색한 인사말로 시작되는 전자우편이 도착한 것은 2016년 8월12일이었다. 당시 <한겨레> 도쿄 특파원이었던 나는 2015년 1월께 ‘당신은 할 수 있나’라는 제목의 특파원 칼럼을 썼다. 그 칼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던 기억이 난다.
사용후 핵연료, 집게로 처리한 ㅎ씨
“며칠 전 <한겨레>에 실린 칼럼 ‘두 말과 원전 이야기’를 읽다가 그야말로 ‘악!’ 하고 소리 지를 뻔했다. 30년으로 정해진 설계 연한이 꽉 차 현재 연장 논의가 이뤄지는 월성 1호기의 사용후 핵연료 교체 과정에서 사고가 났었다는 내용 때문이다. 칼럼에 따르면, 2009년 3월 사용후 핵연료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핵연료봉을 한데 묶는 이음매가 파손돼 두 개는 물에 빠지고 하나는 콘크리트 바닥에 추락하고 말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떻게 수습을 할 수 없으니’ 한국수력원자력은 작업원 1명을 직접 방출실로 들여보내 ‘폐연료를 집게로 직접 처리하게 했다’는 것이다. 사용후 핵연료에선 너무 위험해 인간이 10만~100만 년 동안 가까이 접근하면 안 되는 고선량의 방사능이 배출된다. 누가 그 작업원에게 그런 위험천만한 작업을 지시했으며, 작업원은 왜 그 일을 받아들였을까. 실제 그는 4년 전 검찰에서 ‘몸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이어졌다. 담배를 피울 줄 알았다면 두어 갑 정도는 거뜬히 소진했을 것이다.”
전자우편을 보내온 이는 놀랍게도 칼럼에서 ‘월성 1호기의 작업원’이라고 지칭했던 ㅎ(51)씨였다. 그는 내게 “칼럼을 보고, 엄청 많이 망설이다가, ‘당신은 할 수 있나’란 문구에 마음이 뭉클해 간단히 글을 올린다”고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사고 발생 7년이나 지난 시점에 전자우편을 보내는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생각을 했고, 묻어두려고도 생각했지만 너무 힘이 든다. 이제는 앞도 잘 보이지 않아 자판도 잘 못 치겠다”고 했다. 그는 이후 두어 차례 철철 코피를 흘리는 사진도 보내왔다.
ㅎ씨와 얼굴을 마주하고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본 도쿄에 묶인 몸이었기에 직접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난 4월 귀국 뒤에도 계속 마음에 걸려 6월께 ㅎ씨에게 전화해보니 “사정이 있어 인터뷰는 힘들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보상 문제 등으로 줄다리기를 하는 듯 보였다. ㅎ씨의 입장을 이해했고, 그를 기억에서 지웠다.
한동안 기억 밖에 있던 ㅎ씨의 사연이 머릿속에 되살아난 것은 녹색당 등 9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9월25일 서울 중구 서소문로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연 ‘핵발전소 비정규직 노동과 안전운전 모색 간담회’ 자리에서였다. 이 모임에서 사회를 본 이유진 녹색당 탈핵특별위원장은 “그동안 시민사회에서 탈핵에 대해 여러 논의를 해오면서도 원전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원전 노동의 문제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못했다. 이번 자리가 이 문제에 대해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을 모아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수원이 국회에 제출한 2014년 7월 현재 ‘고용형태별 원전 직원 현황’을 보면 전체 핵발전소 종사자 1만9693명 가운데 한수원 정규직은 6771명(34%), 비정규직은 1114명(6%)이었고, 3분의 2인 1만1808명(60%)이 협력업체 직원으로 확인된다. 원전 노동자들은 비정규직·하청이라는 일반적인 ‘노동’ 문제와 피폭이라는 ‘원전’ 문제 등 이중고에 시름하고 있었다. 이들의 사연을 듣고 ㅎ씨와 주고받은 전자우편 내용을 그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지 않는 선에서 공개하는 것도 좋겠다고 판단했다.
한수원은 사고 은폐 지시
ㅎ씨가 한국의 원전을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에 입사한 것은 1991년 10월(당시 한국전력공사)이었다. 입사 뒤 그는 기초 교육을 수료한 뒤 경북 경주 월성원자력발전소 1호기 핵연료부에서 21년 동안 근무했다.
사고가 터진 것은 2009년 3월31일이었다. 월성 1호기 핵연료 교체 과정에서 장비 오작동으로 핵연료 다발(37개 한 묶음) 가운데 2개의 연료봉이 연료방출실 바닥에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핵연료봉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발전소 전체가 발칵 뒤집힐 만한 중대 사고였다. 사고를 누가 수습할 것인가. 모두 패닉에 빠졌다.
“당시 정비업체인 한전KPS(주) 직원들은 현장 입구에서 ‘자기 죽을 일은 못하겠다’고 발 빼고, 관리자는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못하겠다고 하냐’며 정비업체 사람들과 싸우다 통제실에 전화했다. 통제실에서 정비업체 입단속 시키고 현장에서 나가게 했다. 한수원 설비 담당자도 ‘자기는 못하겠다’고 해 내가 직접 들어가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땐 내 목숨이 몇백 개라도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이웃 사람들과 국민의 목숨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나 한 사람의 목숨을 버리더라도 원전 핵 사고를 막아야겠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핵연료방출실에서 떨어진 핵연료봉을 처리했다.”
사용후 핵연료에선 인간이 접근하면 치명적 영향을 주는 고선량 방사능이 방출된다. 이를 처리하기 위해 ㅎ씨에게 지급된 것은 ‘집게’(!)였다. “10시간 이상 들락거리며 집게(기자님께서 생각하는 최첨단 집게였으면 그나마 좋았겠지만 장례식장에서 사용하는 신발집게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로 떨어진 핵연료봉을 치웠다. 그 뜨거운 열기에 아무런 차폐 장비 착용 없이, 차후 외부로 흘러 나갈까 싶어 방사선 피폭 선량계를 빼앗긴 상태에서, 얼마의 방사능에 피폭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 혼자 작업을 했다. 누구의 지시는 아니었다. 조직에 몸담고 있으면 눈치 빠른 사람은 다 피해버리고 어리석고 멍청한 사람이 처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ㅎ씨는 10시간이 넘는 고된 작업 끝에 바닥에 떨어진 사용후 핵연료를 수조에 넣는 작업을 마쳤다. ㅎ씨는 “10시간 사투 끝에 처리한 후 밖에 나와 쓰러져도 병원에 데려다주는 사람이 없었고, 내가 직접 운전해 새벽 5시께 경주에서 울산 집까지 퇴근”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튿날 어렵게 출근한 ㅎ씨를 기다린 것은 한수원의 은폐 지시였다. 증언은 이어진다. “이튿날 아침에 출근하니 부서장이 직원들을 모아 어제저녁에 있었던 사고에 대해 은폐 지시를 했다. 그와 함께 사고 관련 전자우편을 삭제하고 담당 차장들은 직접 직원들 컴퓨터에 내장된 관련 파일들을 삭제했다.” ㅎ씨는 “당사자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모든 자료가 확보되어 있는데도 (회사에선) 비리 혐의자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언론 플레이를 한다. 너무 억울하다”는 말로 전자우편을 마쳤다.
한정부 공식 통계와 다른 원전 노동 현장
ㅎ씨의 사연은 정상적인 원전에서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특이한 사례라고 봐야 한다. 핵연료봉을 옮기는 기계가 오작동해 이를 떨어뜨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고선량 방사능을 내뿜은 사용후 핵연료를 사람을 투입해 ‘집게’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ㅎ씨와 같은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원전 노동은 다른 노동과 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원전 노동자는 좋든 싫든 피폭을 감내해야 한다. 안전 설비를 꼼꼼히 갖춰 피폭량을 줄일 순 있지만, 방사선에 노출돼 노동자가 피폭된다는 사실 자체를 바꾸진 못한다. 둘째, 그로 인해 노동자의 건강에 이상이 발생하면 안전사고의 확률이 높아진다. 원전에 사고가 발생하면 국가 전체에 재앙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원전 노동자에 대한 피폭 관리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 원자력안전법 등 관련 법률과 규정을 보면, 방사선 작업 종사자에게 허용되는 피폭 한도는 “1년간 50mSv(밀리시버트) 이하, 5년간 합산 피폭선량이 100mSv 이하”로 규정돼 있다. 한수원은 이를 근거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번에 100mSv 넘는 방사선에 노출되면 1천 명 중 5명은 암으로 사망한다. 반면 100mSv 이하일 경우 방사선이 인체에 해를 주는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고 설명한다.
또 원자력안전위원회 고시 ‘개인 피폭방사선량의 평가 및 관리에 관한 규정’을 보면, 원전 종사자 등은 “(방사선) 선량계를 가슴 부위에 착용해야” 하며, 한수원 등은 “종사자들의 피폭 기록에 대한 관리 체제를 구축·운영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원전 노동자는 늘 선량계를 착용해야 하고, 사용자 쪽에선 노동자의 피폭량을 세밀히 관리해 기준치를 벗어나는 피폭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외부에 공개되는 통계상으로는, 원전 노동자에 대한 피폭 관리는 철저히 이뤄지는 중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가 매년 펴내는 <원자력안전연감>(2016)을 보면, 2015년 원전 종사자 1만4926명 가운데 기준치 이상의 피폭을 당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전체 종사자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1만136명은 피폭량이 0.1mSv 이하였고, 가장 많이 피폭을 당한 이(103명)도 10~20mSv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원전 비정규직 노동자의 실태 조사 자료가 말하는 사실은 이와 사뭇 다르다. 경남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만든 원전노동 연구조사 프로젝트 동부벨트가 2017년 1월 발표한 <원전 비정규직 노동 실태 조사·연구>를 보면, ‘방호·방재 매뉴얼에 대한 인지도’를 묻는 질문에 ‘매뉴얼이 있는지도 모른다’(14.2%)와 ‘잘 모른다’를 합쳐 ‘모른다’는 응답이 64.2%나 됐다. 또 ‘회사가 원전 노동자 개인의 피폭 수준을 관리하는 것을 아느냐’는 질문에도 ‘안다’고 응답한 비율은 21.5%에 불과했고, ‘방사능 계측기를 미소지했던 경험이 있냐’는 질문에도 6.7%가 ‘있다’고 답했다. 정부의 공식 통계와 달리 노동 현장에서 안전관리가 철저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 자료다. 사회 전체가 원전 노동자의 안전 문제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방사능 피폭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 채 작업했다”
ㅎ씨의 사후 처리는 어떻게 됐을까. 2014년 11월 국회에서 ㅎ씨 문제를 처음 제기한 김제남 전 정의당 의원은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문제가 불거진 뒤 관련 자료를 분석하고 현장 실태 조사도 다녀왔다. 국회 상임위에서 소위원회도 열어 문제제기를 했다. 그러나 5년 전 일이다보니, 관련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진상은 파악하지 못했다. 한국 원전에서 이런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려 여러 제도 개선이 이뤄졌지만, ㅎ씨 개인의 문제는 흐지부지 넘어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한수원이 ㅎ씨가 당한 피폭량이 기준치(50mSv) 이하인 6.68mSv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를 명확히 반증할 만한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추궁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ㅎ씨는 “차후 외부로 흘러 나갈까 싶어 방사선 피폭 선량계를 빼앗긴 상태에서, 얼마의 방사능 피폭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 혼자 작업했다”고 주장했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한수원 관계자는 “해당 직원의 피폭량은 기준치 이하여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 ㅎ씨는 비리 문제로 이미 해고됐다. 회사와 현재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말했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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