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전 무서운 줄 모르는 후궁 조씨

두 번의 호란과 두 번의 모반. 조선 인조는 1923년부터 1649년까지 재위 26년간 왕권이 흔들릴 만한 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다. 인조를 내조하는 내명부에서조차 시끄러운 나날의 연속으로, 국정 안정에 도움이 못 됐다. 인조의 아내 5명이 지냈던 내명부에서는 어떤 사건이 있었을까?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는 1623년 서인(西人)의 반정(反正)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즉위했다. 중립 외교 대신 ‘친명배금(親明排金, 명나라를 가까이하고 금나라를 배척)’ 정책을 펼쳐 후금(훗날 청)의 침입을 받았다.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두 차례 호란을 겪은 끝에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청(淸)나라 태종에게 군신(君臣)의 예를 올리고 아들을 볼모로 내줬다.
이 와중에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립, 인조를 끌어내리고 새로운 왕을 추대하려고 일으킨 이괄의 난과 심기원의 모반 사건 등 나라 안팎으로 계속된 위기에 국가의 기강이 바로 서지 않았다.
하지만, 군제를 정비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는 업적이 있다.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동사보편(東史補編)·서연비람(書筵備覽) 등 서적을 간행하고, 송시열·송준길·김육·김집과 같은 학자를 배출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 남한산성 성벽의 모습.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이곳으로 피신해 47일간 항전했다. /조선DB


내명부에 들어선 '원흉' 후궁 조씨

인조 8년, 여시(女侍)*로 입궁한 조씨는 인조의 총애를 받아 종4품 숙원으로 책봉됐다. 조씨는 인조가 왕위에 있는 동안 가장 가까이 했던 후궁으로 종4품 숙원에 이어 정4품 소원, 정3품 소용, 정2품 소의를 거쳐 종1품 귀인으로까지 오르게 됐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조씨의 성품을 두고 '패악 무도(悖惡 無道)하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질투가 심해 중상모략을 일삼고 이간질에 능했다. 조씨는 자신에게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인조를 구워삶아 벌을 받게 하거나 관계가 멀어지도록 했다. 인조의 관심이 왕비나 다른 후궁으로 옮겨가지 못했고, 조씨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을 편애했다. 이렇듯 조씨가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어 궐 내에서 권세를 휘두를 수 있었다. 내명부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은 대부분 조씨의 모략에서 비롯됐다.
* 여시: 임금, 왕비, 왕세자를 가까이 모시어 시중들던 여자.
* 조선왕조실록: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약 470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책. 국보 제151호·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출산 직후 슬픔 속에서 눈 감은 인열왕후

인조가 능양군(綾陽君)이었던 시절 혼인을 했던 첫 번째 아내가 한씨였다. 인조가 즉위하자 한씨도 인열왕후로 올랐다.
인열왕후는 6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소현세자, 봉림대군(훗날 효종), 인평대군 등 세 아들만이 성인으로 자랐고 나머지는 일찍이 죽었다. 인조 13년, 인열왕후의 여섯 번째 아들 역시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렸다.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던 인열왕후도 열병을 얻어 나흘 뒤 승하했다.
장릉지(莊陵誌)*에 따르면, 인열왕후는 품성이 유순하고 정숙했으며 검소했다고 한다. 후궁들에게도 너그럽게 대해 인열왕후가 살아 있는 동안 내명부의 분위기는 화목했다. 인열왕후가 승하하자 후궁 조씨의 안하무인 행동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됐다.
* 장릉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겨 강원도 영월로 추방된 이후의 상황을 기록한 책. 윤순거·박경여·권화 등이 편찬.
◀ 인조와 인열왕후가 합장된 파주 장릉(長陵, 사적 제203호·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731년 파주 운천리에서 파주 갈현리로 옮겨왔다. /문화재청
"왕자 낳지 않으면 좋겠다" 독수공방 장렬왕후

인조 16년, 장렬왕후 조씨가 계비로 간택됐다. 가례를 올린 당시 인조는 44세, 장렬왕후는 15세였다. 인천 부사(府使, 지방 장관직)였던 친정아버지 조창원은 어린 막내딸을 시집보내면서 후궁 조씨와 권력 대립이 걱정됐다. 그는 장렬왕후에게 재차 당부했다.
"국모는 삼가고 또 삼가야 하는 자리다. 이미 소현세자가 있으니 네가 왕자를 낳지 않으면 좋겠구나."
장렬왕후는 하루아침에 내명부 수장에 올랐다. 그러나 10대였던 장렬왕후는 30대의 후궁 조씨를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후궁 조씨가 궐의 안주인처럼 행세했다. 인조도 후궁 조씨를 더 아껴 좀처럼 장렬왕후 침전에 들르지 않았다.
장렬왕후는 매일 용모를 단정히 한 채 이 같은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후궁 조씨가 인조에게 '중전이 중풍이 들었다'는 모함을 하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 또한 인내했다. 결국, 장렬왕후는 화병이 들었다. 승하하기 전까지 슬하에 자녀도 없었다.
후궁 조씨 계략으로 처형된 궁녀 2명

인조 21년, 내명부 내 궁녀 2명이 처형됐다. 이들의 죄목은 후궁 조씨를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훗날 실록에는 후궁 조씨가 인조의 승은을 입은 상궁 이씨를 모함해 상궁 이씨와 그의 여종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이었다고 기록됐다.
상궁 이씨는 후궁 조씨가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는 점이 못마땅해 여종 애향에게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이를 후궁 조씨가 알게 돼 인조에게 울면서 "이 상궁이 궁녀 애향과 함께 자신을 저주했다"고 일러바쳤다. 인조의 명에 따라 의금부(義禁府, 조선 시대 사법기관)에서 즉시 상궁 이씨와 궁녀 애향을 잡아들여 조사했다.
삼사(三司)*에서 후궁 조씨의 자작극이라는 것을 알았다. 후궁 조씨의 범행을 밝히기 위해 상소를 올렸다.
"애향 등이 계획을 꾸몄다는 정황은 명백하나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드는 사람입니다. 악의 괴수를 그대로 두고 논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궁녀 애향의 배후를 조사할 것을 아뢰는 내용이었다. 인조는 내명부의 일이라면서 거절, 상궁 이씨와 궁녀 애향을 모두 처형하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 삼사: 조선 시대 언론을 담당한 관아 사헌부·사간원·홍문관를 묶어 일컫는 말. 주로 잘못된 정치에 대해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후궁 조씨와 사이 나쁜 탓에 배척된 소현세자

병자호란 이후 9년간 청에서 볼모로 잡혀있었던 왕세자 소현세자가 인조 18년에 귀국했다. 이때는 후궁 조씨와 결탁한 호위대장 김자점이 조정의 실세였던 영의정 최명길과 그의 세력을 '심기원의 모반 사건'을 빌미로 몰아낸 다음 해였다.
심기원의 모반 사건이란, 좌의정이자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 남한산성 군사 책임자)였던 심기원이 인조 퇴위를 모의했다는 의심을 받고 처형당한 사건을 말한다. 최명길 세력으로 분류되던 심기원이 물러나면서 대립 관계에 있던 김자점이 권력을 독점하게 됐다. 이후 김자점은 영의정까지 올랐고, 그의 손자를 후궁 조씨의 딸인 효명옹주와 혼인을 올리도록 했다.
또, 심기원의 모반 사건은 인조가 왕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를 경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소현세자와 그의 아내 강 빈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후궁 조씨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소현세자의 권력을 무너뜨릴 계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급사했다. 실록에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독살설을 제기하고 있다.

소현세자를 치료했던 의관은 이형익으로, 소현세자가 급사하기 3개월 전에 특채됐다. 그는 후궁 조씨의 외가와 관련된 인물이었다.
게다가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에 있어서도 그의 장남인 원손이 왕세자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대신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됐다. 이는 왕위 계승은 적장자로 이어진다는 성리학의 종법(宗法) 제도와 배치된 것으로, 배후에 후궁 조씨와 조씨를 추종하는 김자점이 있었다. 인조의 적장자인 소현세자가 왕세자가 되고, 소현세자가 죽으면 그의 적장자인 원손이 왕세자가 되는 것이 상식적이었으나 후궁 조씨와 김자점 세력이 “원손은 무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봉림대군도 인조에게 자신의 왕세자 책봉이 부당하다며 거두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역모죄 누명에 사약 받은 소현세자 아내

남편을 급작스럽게 잃고, 아들마저 왕세자 자리에 오르지 못한 강 빈은 이 모든 상황이 후궁 조씨가 조종했다는 풍문이 돌자 후궁 조씨와 관계가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강 빈은 억울했으나 후궁 조씨의 위세에 맞설 방도는 없었다.
이 와중에 인조가 먹는 전복구이에 독이 발견됐다. 강 빈이 독을 넣었다는 의심을 샀다. 후궁 조씨가 인조 앞에서 강 빈이 꾸민 짓이라고 헐뜯었고, 김자점이 강 빈은 역모죄를 저질렀다며 처형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삼사·승정원 등에서 강 빈의 처형은 지나친 처사라며 반대의 상소를 올렸다. 우의정 이경석을 비롯해 대신들도 반대했다. 인조는 더욱 노발대발해 강 빈을 보필하던 궁녀들과 수라간 궁녀들을 줄줄이 하옥시켜 심문했다. 자신의 결정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파직시키거나 유배를 보냈다.
궁녀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해 차례로 죽어나갔다. 강 빈의 두 오라버니들도 체포돼 곤장을 맞아 죽었다. 인조 24년, 강 빈 역시 궁에서 쫓겨나 사사됐다. 사약을 마시고 죽은 강 빈을 싣고 나가는 가마를 지켜보던 민중들은 죄가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단지 추측만으로 처형당했다면서 후궁 조씨의 계략에 희생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 tvN 드라마 '삼총사'에서 배우 서현진이 강 빈 役을 맡았다. /tvN '삼총사' 캡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영원한 권력은 없다는 말처럼 내명부에서 천하의 권세를 누렸던 후궁 조씨는 인조가 승하하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뒤 박대를 받았다. 이내 후궁 조씨는 장렬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무당과 내통했다는 죄로, 효종이 조씨의 '귀인' 작호를 박탈하고 자결하도록 했다. 후궁 조씨가 생전에 상궁 이씨와 강 빈을 상대로 꾸몄던 음모 그대로를 돌려받은 셈이었다.
후궁 조씨가 중전을 무시하고 내명부를 좌지우지했던 것은 사실 인조의 탓이 컸다. 인조는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정통성이 약하다는 약점 때문일까. 선조의 다섯 번째 서자 정원군, 그리고 그 정원군의 아들인 인조는 재위 내내 중전과 자신의 적장자를 멀리하고 후궁 조씨만을 감싸고 돌았다. 내명부의 위계질서가 무너진 틈을 파고들어 조정 대신들 역시 계파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빴다. 결국 청나라의 침략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못 한 채 무릎을 꿇은 인조였다.
□ 그래픽 이은경, 최수영
□ 참고
인조대왕과 친인척(저자 지두환·출판사 역사문화)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저자 이수광·출판사 다산초당)
조선왕조실록에 의한 조선왕비열전(저자 임중웅·출판사 선영사)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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