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대북제재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동아일보]
2010년 TV를 통해 소개됐던 북한의 ‘토끼풀 처녀’. “부모는 굶어죽고 풀을 뜯어먹으며 노숙한다”고 했던 그는 몇 달 뒤 굶어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KBS 화면캡처 |
주성하 기자 |
2월경부터 쌀값이 미치기 시작했다. 1kg에 50원 정도였는데 자고 나면 올라 석 달쯤 뒤엔 230원까지 치솟았다.
120원쯤 됐을 때 사람들이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니냐”며 술렁거렸다. 200원이 넘었을 때 거리는 축 늘어져 좀비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들로 넘쳤다. 식인 사건 등 범죄 소식이 퍼지며 도시 분위기는 불과 몇 달 만에 흉흉하게 변했다.
난 1994년 12월 말 기차역에서 만난 평북 구성의 여인에게서 대량 아사 소식을 처음 들었다. 군수공장이 밀집한 그곳 노동자구(區)에선 여름부터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 시작했고 가을쯤부터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불과 100여 km 떨어진 곳에서 그런 참사가 벌어지는 줄 몰랐다. 그때 북한은 그런 곳이었다. 몇 달 뒤 굶주림은 평양까지 순식간에 삼켰다.
북한 ‘고난의 행군’ 시기를 외부에선 1995∼1998년으로 보지만, 실은 1994년부터 시작됐다. 아사자 수는 300만 명이라 알려졌지만 난 100만 명 미만으로 추산한다. 300만 명이 굶어 죽을 정도면 어림잡아 1000만 명은 심각한 신체·정신적 장애를 겪어야 했을 것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사자 100만 명도 세기의 재난임은 분명하다. 그 현장에 있었던 체험으로 난 북한의 동향을 판단하는 나름의 기준을 가졌다.
현재 1kg에 6000원쯤인 쌀값이 1만3000원쯤으로 오르게 되면 민심이 요동치고 2만5000원을 넘으면 대량 아사가 시작될 수도 있다. 물론 1990년대 중반 상황과 지금이 크게 달라 단정하긴 어렵다. 장마당이 활성화돼 있고, 수백만 대의 휴대전화는 위기 징후를 재빨리 전파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다수 북한 주민은 아사에서 살아남은 경험이 있다.
난 식량 가격을 북한 안정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로 삼는다. 그런데 2013년 1월부터 지금까지 5년 가까이 북한의 쌀값은 5000∼6000원 선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장기간 쌀값이 안정됐던 시기는 수십 년 내 없었다.
그동안 수많은 대북제재가 발표됐다. 특히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무려 5차례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가 ‘역대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쏟아졌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쌀값 변동이 없다. 쌀값이 안정되면 김정은은 민심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핵과 미사일 개발에 ‘올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변동이 없을 것 같지는 않다. 그동안 쌀값 안정은 최근 10년간의 폭발적인 수출 증가가 내수 시장을 받쳐줬기에 가능했다. 2006년 9억4700만 달러였던 북한의 수출은 10년 뒤인 지난해 28억2000만 달러로 3배로 성장했다. 수출이 정점을 찍은 2013년엔 32억1840만 달러였다.
크게 늘어난 외화는 식량 가격을 안정시켰고, 심지어 부동산 거품까지도 만들어냈다. 수출액 증가는 석탄과 의류 수출이 주도했다. 2006년 수출에서 광물과 의류의 비중은 40%였지만 지난해엔 80%로 늘었다. 수출 경제의 체질이 석탄 캐서 팔고, 옷 만들어 외화를 버는 것으로 빠르게 전환된 것이다.
앞으로 석탄 수출과 의류 임가공이 차단되면 외화수입의 80%가 사라진다. 안정적으로 배급과 월급을 받던 각각 수십만 명의 탄광 남성 노동자와 피복공장 여성 근로자가 사실상 실업자가 되며 부양가족도 생계난에 빠지게 된다는 얘기다.
물론 중국이 대북제재를 100% 이행할 리 만무하지만, 절반만 실행에 옮겨도 북한 경제는 큰 타격을 받는다. 연료유 수입이 줄면 장마당 유통 비용이 상승해 쌀값도 오르게 된다.
쌀값이 두 배쯤 오르는 시점을 나는 북한 내구력의 한계점으로 본다. 고난의 행군 때를 보면 한 번 고삐가 풀린 쌀값은 통제가 어렵고, 대비할 틈도 주지 않았다.
지금 미국을 향해 사상 최고의 초강경 대응조치를 보여주겠다며 기세등등한 김정은은 쌀값이 얼마나 올라야 “민심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협상장에 나올까. 물론 그땐 핵무장은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김정은이 끝까지 버틴다면…. 북한은 1990년대 후반 수출 5억 달러로 3년을 버텼다. 심지어 김정은은 100만 명쯤 굶어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지 모른다.
앞으로 대북 압박의 강도는 점점 세질 것이다. 버티고, 제재하고…. 이 과정이 반복돼 대량 아사가 초래돼도 간부들은 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제일 먼저 구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장애인이 되고, 김정은 체제를 옹호하던 기득권층들만 살아남는 통일이라면, 난 그런 통일은 절대 반대다.
제재는 강력해야 하겠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구분하는 이성은 갖고 있어야 한다. 인질범 잡겠다고 인질들부터 죽여선 안 된다. 핵에 집착하는 김정은 한 명을 어찌 못해 대신 수십만∼수백만 명의 목숨을 제물로 삼는다면, 어떤 명분으로도 이를 정당화할 순 없을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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