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메이지 일본의 '성공' 비결
[경향신문]
일본 홋카이도 남단 하코다테에 가면 고료카쿠(五稜郭)라는 성이 남아 있다. 1868년 궁정 쿠데타로 천황을 빼앗기고 한순간에 ‘조적(朝敵·조정의 역적)’이 된 도쿠가와 막부군이 마지막 저항을 했던 곳이다. 교토를 탈출한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본거지인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로 돌아왔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지휘하는 천황군은 에도 코앞까지 진군해왔다. 일촉즉발, 인구 100만이 사는 에도 한복판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질 참이었다. 에도 총공격 하루 전 양측은 전격 합의했다. 쇼군은 항복하고 일개 다이묘(大名·봉건영주)로 내려가기로. 천황군은 에도를 무혈 접수했다.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막부 가신들은 앙앙불락, 폭발 직전이었다. 이때 막부해군 총사령관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반발세력을 함대에 태우고 에도만을 탈출하여 머나먼 홋카이도(당시는 에조치·蝦夷地, 즉 오랑캐 땅이라 불렀다)로 향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중과부적, 에노모토는 1869년 5월 투항했다(손일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메이지 유신>).
패장의 처형은 당연한 것,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에노모토를 항복시켰던 천황군 사령관이 구명운동에 나선 것이다. 이유는 그가 죽이기 아까운 탁월한 인재라는 것. 에노모토는 1861년 몇 명의 막부 가신들과 함께 네덜란드에 유학해 무려 5년간 선박항해술, 증기기관, 화학, 국제법 등을 맹렬히 공부했다. 당시 해군과 화학에 관한 한 일본에서 그와 다툴 자는 없었다. 결국 투옥은 됐으나 목숨을 부지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 후 에노모토는 메이지정부의 요직을 두루 맡았다. 러시아와 사할린 영토분쟁 때 특명전권 공사로 임명되어 사안을 깔끔히 마무리하더니, 해군경에 오르고 외무대신 등 대신을 네 차례나 역임했다. 불과 몇 년 전 정부군에 끝까지 항거하던 적장인데도.
독자들에게 생소할 에노모토 이야기를 길게 소개한 것은 메이지시대 일본을 강하게 만든 힘 중 하나는 ‘국민통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노모토뿐만이 아니라 막부의 유신(遺臣)들이 메이지정부에서 활약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사실 막부는 일찌감치 개명정책을 취하고 양이운동의 광풍이 불 때도 초지일관했기 때문에, 서양에 정통한 인재를 가장 많이 품고 있었다. 지금 일본 1만엔권에 초상화가 실려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게이오 대학을 세우고 언론계의 거물로 활약했으며, 도쿄제국대학 총장을 역임한 가토 히로유키도 막부 출신이었다. 메이지정부는 권력 핵심부에 그들을 들여놓지는 않았지만, 막부 인재들을 죽이지도, 내치지도 않고 폭넓게 등용했다.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은 1898년 메이지천황이 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만나 ‘조적’의 오명을 사면해준 것이었다. 요시노부는 공작이 되어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 이제 막부의 수장도 천황의 신하로, 그것도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복권된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메이지정부의 급진적인 서양화 정책에 부글부글하던 사무라이들은 1877년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서남전쟁). 그 리더는 공교롭게도 몇 년 전 막부토벌군의 총지휘자였던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이 반란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진압되었고, 사이고는 할복했다. 이쯤 되면 ‘반란의 수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패장 사이고에 대한 칼질은 없었다. 메이지정부도 그에 대한 험담은 피했다. 그러더니 반란을 일으킨 지 20년 만에 메이지천황은 그를 사면하고 정 3위에 추증했다. 또 한명의 반란수괴가 사면복권된 것이다. 그리고는 도쿄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우에노 공원 입구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웬 뚱뚱한 아저씨가 개 한 마리 끌고 있는 그 동상 말이다.
‘그러니 당시 일본사람들은 대단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학자의 분석으로는 모자랄 것이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그 원인으로 세 가지 정도를 들고 있다. 첫째 천황의 영향력. 천황의 권위가 급상승하면서, 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존왕(尊王)의 일념은 다들 같았다고 과거를 덮었다는 것. 둘째 내셔널리즘. 대외적 긴장을 선동하면서 내부를 단결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피아의 대립이 완화되었다는 것. 실제로 다른 나라의 혁명에 비해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의 수는 압도적으로 적다. 그러나 강렬한 내셔널리즘은 동족상잔은 최소화했지만, 해외에서는 ‘자유롭게’ 대규모 살상을 자행케 했다. 셋째, 막부타도파와 막부 간에 사실상 노선 대립이 거의 없었다는 점(졸저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민음사). 메이지정부의 정책은 대부분 막부를 계승한 것이기에 막부 출신들의 협조를 필요로 했다. 그 이유야 무엇이었든 메이지 시대 일본이 탁월한 통합력을 과시한 것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는 왕조가 교체된 것도 아니고 밖에 나가서 대규모 살상을 저지를 일도 없다. 좀 더 통합해도 된다. 우리에게는 모두가 복종하고 입 다물 천황 같은 존재도 없다. 심복할 대상이 변변히 없으니 다들 반항적이다. 그러나 인재는 대개, 반항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 내 말 잘 들어야 발탁한다면 그는 유능한 인사권자가 아닐 것이며, 그 사람은 에노모토 같은 인재는 아닐 것이다.
<박훈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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