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점의 불꽃과 빛나는 함축의 순간들
시간에 풍화된 존재자들 복원
"다시는 '비슷한' 시집 내지 않겠다"
[한겨레]

하동
이시영 지음/창비·8000원
첫 시집 <만월>(1976)에서 서술성을 내포한 서정시의 문양으로 1970년대적 성과를 선명하게 집약했던 이시영(사진)은, 1990년대 이후 매우 중요한 존재론적 전환을 치른다. 그 상징적 지표가 되어준 시집이 아마도 <이슬 맺힌 노래>(1991)였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시영이 거둔 최상의 성취로 이 아름다운 시집을 주저하지 않고 추천한다. 여기에는 지금의 이시영을 떠받치고 있는 여러 속성들, 예컨대 고도로 함축된 단시 미학이나 사람과 풍경에 대한 잔잔한 기록으로서의 기억의 형식 등이 심미적 언어로 펼쳐져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시집 서문에서 이시영은 새로운 정신 차원을 열어가고자 하는 남다른 의지를 고백한 바 있다. “나는 이제 이 시집을 끝으로 나를 옭아매고 있었던 고요한 늪의 세계, 아득한 죽음의 세월로부터 과감히 벗어나고자 한다. 나의 언어여 새로운 무기를 들자. 그리고 정신이여 또다시 뜨거운 피를 흘리자.”
이후 이시영은 <무늬>(1994), <사이>(1996)를 거치면서, 짧은 산문시형을 실험적으로 정착시켰고, 자신만의 형식 미학적 지평을 견고하게 확장해간다. 그리고 정신적 성숙과 예지의 경험을 표상하는 내성의 의지를 통해 마음의 미세한 떨림까지 담아내고자 하였다. <은빛 호각>(2003)과 <바다 호수>(2004),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2007)로 이어져간 이러한 흐름은, 기억 속의 시간을 현실 변화 과정 속에서 읽어냄으로써 역사적 삶과 죽음의 구체성을 복원하는 기획을 일관되게 반영한 바 있다. 이는 시인 스스로 추구해 마지않았던 사물의 속뜻과 현실의 엄혹함을 매개하고 결속하려는 욕망을 단단하게 담고 있는 것이었다. 직관적 기억이 불러주는 것들을 하나하나 선명하게 의식의 촉수로 생성해내는 그러한 구체성과 역사성에 대한 그의 믿음이 <호야네 말>(2014)과 이번 시집 <하동>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시영의 고향인 구례의 이웃 지역이기도 한 ‘하동’을 표제로 삼은 이번 시집은, “침묵에 가까운 최소언어”(염무웅)로 “소수자의 집합적 초상”(최원식)을 그려낸 드문 역작이다. 그만큼 이번 시집은 이시영 미학의 극점으로서, 시간의 풍화 속에서 사라져간 존재자들의 간절하게 글썽이는 삶을 세심하게 복원해간다. 순간에서 역사를 보고, 도회 한복판에서 고향을 떠올리고, 생애의 소실점에서 ‘지금 여기’의 삶에 충격과 위안을 동시에 건넨다. 이처럼 이시영은 시집 곳곳에서 타자들의 외따로운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가령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작고 낮은 그 소리”(‘보길도’)를 경청하고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그네’)을 증언한다. 그렇지만 “세상과 등을 지고 나와 대면하리라”(‘귀래사’)라든지 “내 영혼도 한때는 저렇듯 푸르고 깊었다는 것”(‘하늘을 보다’)에서 보듯이, 그는 서정시가 여전히 스스로를 향하는 자기 탐색의 여정임을 또한 보여준다. “문득 뒤돌아보는 승냥이의 고독한 눈빛!”(‘섬광’)으로 말이다. 또한 이번 시집에는 이시영 특유의 섬광으로 담아놓은 ‘비허구’에 가까운 서사들이 여럿 등장한다. ‘시자 누나’, ‘학재 당숙모’, ‘전차’, ‘어떤 졸업식’, ‘명식이 형’, ‘산동 애가’, ‘휴전’ 등에 고단하고 혹독했던 한국 근현대사가 이시영의 서늘한 기억과 함께 펼쳐져 있다.

이번 시집은 민중 서사라는 굵은 획을 버리지 않으면서, 그 안에 언어적 섬광이 흩뿌리는 함축의 순간을 잊지 않는 이시영 특유의 예술적 의장으로 빛난다. 반세기 가까운 시력을 맞아 “이 시집을 끝으로 다시는 관습적으로 ‘비슷한’ 시집을 내지 않겠다.”(‘시인의 말’)라고 하는 이시영. 이제 나는 그의 빛나는 성취로 이번 시집을 또한 말해야 할 것 같다. 정점의 불꽃과 빛나는 함축의 순간들이 그 안에 섬진강 물결처럼, 지리산의 황혼처럼, 번져온다. 그래서 나는 “시인으로서의 창조성이 쇠진”(‘시인의 말’)하지 않고 그가 이루어갈 다음 시집의 ‘치명적 도약’을 고대할 수 있으리라.
유성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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