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ifty+ >근엄했던 교육자 부부, 춤사위로 '인생 2막' 열어젖히다

인지현 기자 2017. 8. 1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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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오른쪽 사진), 이숙경 부부가 지난 10일 서울 국립국악원 국악연수관에서 국악가락에 맞춰 흥겨운 춤사위를 선보이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교직 은퇴후 전통무용수 변신 박승준·이숙경

아내는 붉은 꽃송이가 만발한 부채를 들고 선이 고운 흥지무를 추고, 남편은 팔을 휘휘 저으며 한량들 노는 모습을 그린 한량무를 춘다. 교방춤에 바탕을 둔 흥지무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낸 부채 입춤이고, 남성적인 기품이 살아 있는 한량무는 정과 흥에 젖어든 선비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춤이다. 아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장단 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도 잠시,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들은 구슬픈 노랫가락을 틀더니 이내 10여 분 길이의 한 곡을 다 춘다. 아내는 고희(古稀), 남편은 희수(喜壽)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붉고 푸른 의상을 입고 추는 춤에서는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은퇴 전 각각 대학생과 고등학생 제자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던 박승준(75)·이숙경(69) 부부가 순식간에 근엄한 교육자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즉흥 춤의 세계로 빠져드는 과정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지난 10일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에서 강의실로 사용하는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국악연수관에서 만난 이들 부부는 “인생 황혼기에 만난 전통 무용은 단순한 취미활동이 아니라 교단에서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삶’으로 가는 길”이라고 털어놨다. 은퇴 후 큰 욕심 없이 춤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국내 지방 전통 축제는 물론 일본과 태국, 미국 등 해외 무대에서도 공연을 선보이는 어엿한 시니어 무용수로 대우받고 있다. 부부는 이날도 두 시간여 동안 전통 한복 차림에 맞춰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까지 한 후 인터뷰에 응했다.

서울대 사범대 교정을 누비던 ‘캠퍼스 커플’에서 각각 대학 강의실과 고등학교 교실에 선 ‘부부 교육자’를 지나 손주들을 본 ‘노부부’가 되기까지. 수십 년간을 늘 붙어 지낸 탓에 주변으로부터 ‘이제 좀 떨어져 있어도 되지 않느냐’는 우스갯소리를 듣는 이들 부부지만 아직도 서로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노년에 찾은 공통의 취미 활동이 부부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문화학교의 문을 먼저 두드린 것은 아내 숙경 씨였다. 어렸을 때부터 춤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던 그는 은퇴를 몇 년 앞두고 적극적으로 강좌를 찾아다녔다. 국내에서 전통 무용이나 악기를 배울 수 있는 곳은 이곳 문화학교 외에도 국립극장 전통예술아카데미와 기초자치단체 소속 아카데미, 민간 강습소 등이다. 그러나 문화학교만큼 문화재보유자, 국립국악원 단원 등 경쟁력 있는 강사진을 갖추고 있는 곳이 많지 않고 이곳에선 정재, 삼고무, 오고무 등 여타기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수업도 진행되고 있어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문화학교에는 주 1회 남짓한 수업을 듣기 위해 강원도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수강생들이 상당수다.

그가 1997년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배운 수업만 입춤, 살풀이, 승무, 한량무, 태평무, 교방청춤, 산조 등 십수 가지나 된다. 처음엔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어색했지만 10년 차가 넘어가면서 구력이 붙더니 대한민국 전통예술경연대회 대상(2010), 복사골 국악대제전 전국국악경연대회 대상(2011), 해외공연단 선발 대한민국무용대회 한국무용 대상(2012) 등을 꿰찼다. “국립국악원 무용단 소속 최병재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2010년부터 뜻이 맞는 제자들끼리 의기투합해 ‘바치울 무용단’이라는 걸 만들어 경연대회에 나가거나 지방 공연을 다녔어요. 그때만 해도 다들 50∼60대 동년배여서 인생 2막을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즐겁게 하다 보니 3년간 각종 대회서 받은 대상만 해도 8개네요.” 이제는 단순히 취미 수준이라고 하기엔 전문 무용수의 경지에 가까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삶의 활력을 찾은 아내를 보며 자연스럽게 남편도 무용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밤 늦게까지 문화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아내를 데리러 가기를 몇 번, 결국 남편도 1년치 수강권을 끊었다. 은퇴 전 배화여대에서 문학을 가르쳤던 승준 씨는 “그동안 강단에서 ‘입’으로 살아왔으니 퇴직 이후에는 ‘몸’ 위주로 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엉겁결에 시작된 춤 공부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니 새삼 놀랍다”며 웃었다. 그간 문화학교에서 전통 무용은 물론, 민요와 단소도 배웠지만 결국 몸을 쓰는 일에 가장 애착이 갔다고 한다. 그는 “춤이 몸으로 하는 거다 보니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기 쉬운 근력을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힘이 떨어지면 춤선이 무너지기 때문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도 일부러 서서 가는 게 습관이 돼서 또래보다 체력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어 “경직된 삶을 살아왔던 한국사회 중년 남성들에게 무엇보다 무용이 좋은 이유는, 몸의 유연함과 더불어 사고와 태도의 유연함도 갖출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라며 주변에도 적극 추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부부가 함께 배우는 것을 권한다며 “때로 말보다 춤으로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이들 부부처럼 어느 정도의 실력을 쌓다 보면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문화학교는 강좌별로 디딤(초급), 돋움(중급), 맺음(고급) 과정을 각 1년 동안 총 3년 과정으로 들을 수 있도록 해, 단순히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지 않도록 교육시킨다. 그 후에는 매년 10월 국립국악원 연희마당에서 수강생들이 참여하는 야외공연 ‘국악 하루’를 진행하고, 연말에는 수료식 발표회 공연을 열어 3년 이상의 수강생들이 준전문가의 기량을 뽐낼 수 있도록 한다. 수강생들의 재능기부 공연을 통해 소외된 이웃과 전통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자리도 있다. 다양한 무대 경험을 토대로 일본, 태국 등지에 있는 각국의 전통문화원과의 교류를 통해 해외 공연도 한다. 특히 숙경 씨는 2015년 7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대상으로 기념 공연을 했던 때를 떠올리며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고 말했다. “이제는 다 돌아가시고 열 분도 채 남지 않은 80대 한국전 참전 용사들 앞에서 춤을 췄어요. 그분들이 저희 공연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예전 일을 추억하시는 걸 보니 저도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참느라 혼났습니다.”

부부는 지금도 배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아내는 현재 문화학교에서 승무, 흥지무, 살풀이 2개 등 총 4개 강좌를 듣고 있다. 남편은 한량무, 부채산조, 살풀이 등 3개 강좌를 수강 중이다. 문화학교에서는 110개 강좌가 진행 중인데 무용강좌는 이 중 60여 개에 달하며 신청 기간이 시작되자마자 당일 접수가 마감되는 인기강좌들도 있다. 해금, 가야금, 거문고 등의 악기 강좌에 대한 관심도 점차 높아지고 있으며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해 이곳에서 가야금을 배운 데 이어 올해 거문고 수업까지 들을 예정이라고 한다. 강좌는 2월부터 12월까지 약 1년여 단위로 진행되며, 1년에 40주에 달하는 과목당 연간 수업료가 40만 원에 이르는 만큼 부부가 올해 지출한 돈은 280만 원.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여러 강좌를 동시에 수강하는 학생층이 두터운 이곳에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다. 특히 문화학교에 따르면 50∼70대 시니어가 전체 수강생의 70%를 차지하며 최고령으로 83세 수강생도 있다.

어느덧 전통 무용을 배운 지 20년이 넘은 숙경 씨는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재능기부 형식으로 청소년들에게 전통 무용을 가르쳐 주는 일이다. 2009년엔 동서대 대학원에서 한국무용 지도자 과정을 수료했고 2011년에 국악교육지도사 자격증도 땄다. 그는 “교원총연합회에서 은퇴 교사들이 청소년들에게 재능기부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 내년쯤 지원하려고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문화학교 관계자는 전통 무용 비전공자라고 하더라도 오랜 학습을 통해 경력과 실력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강사로 나설 수 있다고 귀띔했다.

인지현 기자 loveofall@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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