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인의 잡학사전]A급 전범은 B, C급보다 나쁜 X?
[동아일보]
해마다 광복절(8월 15일)이 되면 일본 정치인들이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할 것인지 아닌지 관심이 쏠립니다. 그때마다 따라오는 표현이 이 신사가 “A급 전범을 합사(合祀)했다”는 겁니다. 도대체 A급 전범은 뭐고, 합사는 무엇이기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문제가 될까요?
2015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부인 아베 아키에(安倍昭惠) 여사. 아베 여사 페이스북 캡처. |
전범(戰犯)은 일단 ‘전쟁 범죄인’을 줄인 말입니다.
A급 전범은 문자 그대로 그 중에서 A급(級)이라는 뜻입니다. A급이 있으면 있을 터. 실제로 B급 전범과 C급 전범도 있습니다. 그러면 A급 전범이 제일 나쁜 사람들이고 B, C로 내려갈수록 덜 나쁜 사람들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이 전쟁과 관련된 동아시아 전범을 심판할 수 있도록 극동군사재판을 열었습니다. 이 재판에 필요한 조례를 만들면서 제5항 a, b, c조에 전범 분류 조항을 넣었습니다. 이 a~c조에 해당하는 전범이 바로 A~C급 전범입니다.
이 조례에 따르면 △A급은 평화에 대한 죄(crimes against peace) △B급 통례의 전쟁 범죄(conventional war crimes) △C급은 비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혈액형 중에서 A형이 B형보다 더 품질(?)이 뛰어난 게 아니듯이 A급 전범이라고 꼭 BC급(보통 이렇게 붙여 씁니다) 전범보다 더 악랄한 건 아닙니다. 당연히 처벌도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였습니다. A급 전범인데 징역형만 받은 사람도 있고, (보통 이렇게 붙여 씁니다) BC급 전범인데 사형을 선고받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A급 전범이 문제가 되는 걸까요?
이 조례가 스스로 증명하는 것처럼 어떤 급 전범이 되려면 일단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재판을 받으려면 기소를 해야 하죠. 극동군사재판에서는 A급 전범으로 분류 가능한 인물 중에서 고위 군사 지휘관과 정부 각료만 기소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인물이 A급 전범이 됐습니다.
일본 주요 전범을 처벌하려는 목적으로 1946~1948년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 장면. 재판이 도쿄(東京)에서 열려 흔히 도쿄 재판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재판 결과 7명이 사형, 16명이 종신형, 2명이 유기금고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
그러면 합사는 뭘까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합사는 ‘둘 이상의 혼령을 한 곳에 모아 제사를 지낸다’는 뜻입니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서 합사는 ‘한 곳에 모아’에 방점이 찍힙니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 영새부(靈璽簿·죽은 이의 이름과 간단한 사항을 적은 책)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총246만6532 명.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사자들 위패가 없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한번 합사한 제신(祭神)을 빼는 것은 불가능하며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A급 전범을 합사했다는 건 이들을 원래 이 신사에서 메이지(明治) 시대 이후 제사를 올렸던 다른 전사자들과 똑같이 취급하겠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이들을 전범으로 규정한 극동군사재판 판결을 부인하는 행위고, 이건 침략 책임을 부인하는 행위가 됩니다.
사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일본 정치인들이 여러 차례 이 신사를 참배했지만 1978년까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해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자 동아일보는 ‘일본 우경화의 계절’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내며 비판했습니다. 1978년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이 A급 전범을 합사한 해입니다.
후쿠다 다케오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소식을 전한 1978년 8월 28일자 동아일보 지면. |
야스쿠니 신사는 분명 일본 국왕(일왕)의 군대(황군)를 미화하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전쟁 당시 재임 중이던 히로히토(裕仁) 일왕조차 A급 전범을 합사한 1978년 이후로는 이 신사를 한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키히토(明仁) 현재 일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왕가에서 보기에는 A급 전범 14명이 쓸데없이 전쟁을 벌여 자기들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존재일 테니까요.
사정이 이런 데도 일본 보수 세력은 아소 다로(麻生太郞) 전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는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같은 곳”이라고 발언하는 등 야스쿠니 신사를 옹호하기 바쁩니다.
그러니 이렇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렇게 만들고 싶으면 말도 안 되는 논리 집어치우고 일단 A급 전범부터 분사(分祀)하라”고 말입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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