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절제와 경청, 능력을 빌려 쓰는 리더십

2017. 8. 10.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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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은 1400년간 존속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다. 그 제국의 창시자는 카이사르이다. 하지만 그는 암살당했다. 제국 건설의 막중한 의무는 불과 19세의 ‘어린 후계자’에게 넘겨졌다.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는 절제의 리더십을 발휘해 제국을 완성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그의 리더십의 본질은 ‘같이 가는 것’ 즉 함께였다.

▶19세의 어린 후계자, 정적에 둘러싸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존속했던 제국은 로마제국이다. 서로마 제국은 물론 비잔틴의 동로마까지 약 1400년간 유지되었다. 그 제국의 시작을 학자들은 카이사르에게서 찾는다. 카리스마, 대중적 친화력, 결단의 리더십, 노련한 군지휘력을 자랑하는 카이사르가 로마 제국의 창업자인 셈이다. 하지만 그의 시대는 1인 지배체제, 즉 절대 권력자 황제의 탄생을 두려워한 원로원공화파의 반란으로 종식되었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쓰러졌다. 이때가 기원전 44년이다. 로마는 혼란에 빠졌다. 원로원을 장악한 공화파 귀족들은 권력투쟁에 들어갔고 시민들은 영웅의 급작스런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물론 대부분의 원로원 의원과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카이사르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의 아들인 7살 카이사리온, 또 한 명은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수많은 전쟁터를 누빈 38세의 안토니우스였다. 사람들은 안토니우스라고 판단했다.

드디어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유언장에는 “나의 후계자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이며 그를 나의 양자로 삼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기원전 63년에 태어난 옥타비우스, 그는 카이사르의 누이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외손자로 당시 불과 19세의 애송이였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배신당했다”고 분노했고 원로원 귀족들은 애송이를 요리할 생각에 즐거운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양자, 즉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되었다. 그는 카이사르가 암살될 당시 로마가 아닌 변경에 머물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참모들은 그가 로마가 아닌 마케도니아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마로 가면 로마의 군권을 장악한 안토니우스에게 암살당한다는 이유였다. 19세의 옥타비아누스는 침착하고 사려 깊었다. 그는 로마로 갈 것을 명령했다. 로마에 입성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행사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제거할 생각뿐이었다. 그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파를 숙청하지 않았고 카이사르를 신격화 하자는 의견에도 반대했다. 또한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남긴 막대한 재산 상속에도 소극적이었다. 당시 로마의 최고 실력자는 안토니우스였다. 그는 군대, 재정, 인맥, 원로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성급했다. 그는 하루빨리 제1인자가 되어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어받고 싶었다. 그의 행보는 독재자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러자 원로원 공화파에서 안토니우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선두는 키케로였다. 그는 카이사르도 반대했던 철저한 공화파.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는 지금 카이사르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안토니우스의 행보에 제동이 걸렸다. 역설적으로 공화파의 도움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정세를 분석했다. 비록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지만 카이사르만한 능력과 리더십을 갖추지 못했고 반면에 안토니우스는 실권은 있지만 명분을 잃었다. 원로원과 시민들은 공화파와 왕정파로 나뉘어졌다.

옥타비아누스는 발톱을 감추고 시간을 벌기로 했다. 그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에게 권력 분점을 제안했다. 이른바 제2차 삼두정치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누이를 안토니우스와 결혼시켰다. 정략적 결합인 것이다. 이 세 사람은 집정관이 되어 로마의 권력을 나누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치밀했다. 그는 삼두정치의 이름으로 원로원 안의 다수를 장악한 공화파 특히 반 카이사르파를 숙청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안착에 도움을 준 키케로 역시 숙청당하고 말았다.

기원전 40년 3월15일 카이사르 기일을 맞아 옥타비아누스는 무려 300명의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했다. 카이사르 암살에 대해 철저한 복수를 하면서 자신이 카이사르의 유일한 후계자임을 로마에 알린 것이다. 그리고 이 숙청의 이면에는 세대 교체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원로원에 ‘친 옥타비아누스’ 세력이 포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이사르와 함께 수십 년을 전쟁터를 누빈 충성스런 로마 정예군단을 장악했고 카이사르의 막대한 유산도 물려받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직속 군단에 공을 들였다. 그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했고 그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마음을 얻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서서히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 같은 옥타비아누스의 행보는 도저히 19세 젊은이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노련한 정치가의 모습이었다.

▶절제와 전략으로 승리를 거머쥐다

로마에서 지지층을 결집한 옥타비아누스는 삼두정치의 가장 약한 고리인 레피두스를 숙청했다. 레피두스는 당시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도 이에 동의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제1차 삼두정치의 주역인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았다. 그의 조카딸과 결혼한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의 막강한 해군력을 얻었다.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없다는 판단이 들자 그의 조카딸과 이혼하고 훗날 로마 제국의 최초의 황후가 되는 드루실라와 결혼한다. 폼페이우스의 세력은 내부에서 붕괴했다. 폼페이우스의 부하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폼페이우스의 모든 것을 갖고 투항했다. 세력을 확장한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를 변경에서의 패전 책임을 물어 숙청했다. 비정한 권력투쟁이었다. 이제 로마의 최고 권력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달콤한 제안을 했다. 로마 지배지 분할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은 로마와 서방을 통치하고, 안토니우스에게는 이집트와 동방을 제안했다. 당시 이집트와 동방은 로마 재정의 공급처였다. 한마디로 돈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이 제안을 받았다. 그는 이미 확보한 군권에 재정을 강화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모셨던 카이사르의 연인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치밀했다. 그는 살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취하는 작전을 폈다. 옥타비아누스는 동방과 아프리카를 포기하고 로마를 장악하는 것이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고 여론전에서도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신격화를 원로원에서 통과시켰다. 이제 카이사르는 신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로 격상된 것이다. 이제 로마의 모든 권력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치마 폭에 싸인 안토니우스에서 옥타비아누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신선놀음에 빠졌다. 클레오파트라와 실질적인 부부가 된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이혼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 아들 3명을 낳았다. 이것은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의 정략적 결합이 깨졌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로마 군단으로 점령한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클레오파트와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임명했다. 로마는 격분했다. 원로원에서는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배신자다”라는 비난까지 나올 정도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이 봉인되어 있는 신전에 강제로 들어가 유언장을 공개했다. 그 유언장에는 “내가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속주들은 나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들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나와 클레오파트라의 묘는 알렉산드리아 신전으로 정한다”라고 적혀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같이 집정관에서 물러나자는 제안을 했다. 안토니우스가 당연히 거부하자 이를 “안토니우스가 독재적 권력을 원한다”는 명분으로 공격했다. 그를 한순간에 독재자로 만든 것이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설계에 넘어갔다. 원로원이 앞서서 안토니우스를 공격한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는 로마를 버리고 이집트를, 서방을 버리고 동방을 선택했다”고 비난하며 그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원로원과 로마 시민은 모두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는 카이사르의 최측근으로 많은 전쟁터를 누빈 그야말로 역전의 용사. 그에 비해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적 식견, 판단력에서는 뛰어나지만 군사적 전략이나 경험은 일천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직속 군단과 이집트 연합군으로 옥타비아누스를 100%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오판이었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자신의 군사적 미숙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대신한 탁월한 전략가를 영입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이자 영원한 동지 아그리파이다. 기원전 31년, 악티움에서 양쪽의 대군이 부딪쳤다. 결과는 아그리파의 대승이었다. 패전의 충격에 빠진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갔다. 기원전 30년,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자살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상관인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를 과소평가했다. 그 결과는 비참했다. 호랑이도 토끼를 사냥할 때도 전력을 다하는데 하물며 옥타비아누스는 토끼가 아닌 ‘신의 아들’임을 간과한 것이다.

▶공화파, 왕정파의 갈등 조정자

33세의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19세의 나이에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된 뒤 14년 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폼페이우스 그리고 로마 원로원의 노련한 정객들을 모두 제압한 것이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옥타비아누스의 첫 행보는 정적에 대한 용서였다. 그는 오랜 내전에서 자신과 대척점에 섰던 의원, 귀족, 속주 총독, 로마 군단장 등을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였다. 진정한 포용의 리더십을 보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로마의 속주 이스라엘의 헤롯왕이었다. 그는 본래 안토니우스의 지배를 받았고 또한 안토니우스 충실한 지지자였다. 안토니우스의 죽음 이후 헤롯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호출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심문했다. 그러자 헤롯은 “악티움 해전이 있기 전 동방에서는 안토니우스가 패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 많은 사람이 안토니우스를 배신했다. 하지만 나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마찬가지다. 이제 제국은 옥타비아누스의 것이다. 나는 안토니우스 다음으로 내가 섬기고 충성을 다 할 사람은 옥타비아누스라고 생각한다. 끝까지 충성하겠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을 용서하면서 그에게 요르단까지 통치하도록 허락했다. 제국의 지배자다운 배포와 풍모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통치 형태를 공화정이라고 공식 선포했다. 그리고 자신의 동지 아그리파를 집정관에 임명했다. 로마의 공화파들은 안심했다. 그들은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될까 두려워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노련했다. 그는 명분을 중시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쟁취하는 방법을 썼다. 로마는 형식은 공화정이었지만 실제는 옥타비아누스 1인 통치였다. 기원전 29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제1인자. 국가 제1시민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당연히 집정관도 겸임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화답했다. 원로원을 중시하고 시민정치, 공화정치를 존중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강력한 로마군단을 자신의 지휘 하에 배치했고 화폐 발행권을 행사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제 로마 제국에서 권력, 명분, 군사력, 부로 옥타비아누스와 견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기원전 27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는 ‘존엄한 자’라는 뜻으로 황제의 또 다른 호칭인 셈이었다. 그러자 아우구스투스는 “이제 로마 제국은 평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특권을 반납하고 공화정을 존속하겠다고 밝혔다. 원로원과 공화파의 끝없는 의심에 아우구스투스 역시 끝없이 대답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우구스투스가 양보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직할지를 늘려 재정을 확보했고 17만 명의 로마 정예병을 양성해 그 누구도 무력으로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임페라토르’ 즉 ‘승리자’라는 호칭을 만들어 부르게 했다. 이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마지막 계단만 남겨 둔 것이다.

기원전 23년 몸이 약했던 아우구스투스가 중병에 걸렸다. 로마의 모든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심복 아그리파에게 임시 권한을 물려주고, 군사권은 사위 마르켈루스에게 위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만약 이런 조치가 취해진다면 아우구스투스가 회복한 후에 바로 황제로 취임할 것이며 이때는 공화파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허를 찔렀다. 그는 자신의 권한을 동료 집정관 피소에게 위임했다. 절대로 제정 시대를 열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사 표시였다. 로마 시민, 원로원 공화파들은 이제야 아우구스투스를 믿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점차 강화되었다. 호민관 특권을 영구적으로 부여받았고 로마군에 대한 최고 지휘권도 영구적으로 부여받았다. 게다가 감찰권까지 확보해 사실상 황제에 버금가는 위치까지 올랐다. 즉 임페라트로로 군통수권을, 프린켑스로 원로원의 1인자를, 호민관이 되면서 로마 시민의 대표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투스는 권력 상속의 길을 열었다.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이며 양자임을 세상에 다시 알려 자신의 후계자 역시 자신의 혈통에서 승계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공인 받은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을 잘 운영해 풍부한 재정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를 로마 시민에게 되돌려주며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군인 연금을 만들어 군대의 충성을 확보했으며 원로원의 구세대와 공화파를 제거해 원로원의 복종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기근이 있으며 국고뿐 아니라 자신의 개인 재산까지 기부해 시민의 안정을 도왔다. 그뿐이 아니었다. 외교와 무력을 번갈아 사용해 변경을 안정시켜 전쟁 없는 시대를 이끌어냈다. 또한 로마에 소방청과 경찰청을 설치해 재해나 범죄로부터 안전한 로마를 만들었다. 조세제도의 개혁, 교통과 도로망 구축 등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정책은 로마 제국과 시민을 위한 것으로 로마 시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물론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강화하는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 군단과 별도로 자신의 경호와 명령을 직속으로 집행하는 정예부대인 근위대를 창설했다. 근위대는 로마 군단과 더불어 아우구스투스 권력의 핵심이었다. 이 근위대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적을 제거하는 훌륭한 도구였으며 이후 로마 제정에서 황제의 즉위와 체제 유지의 선봉이 되었다.

기원전 12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종교의 수장인 대신관이 되었다. 이제 정치는 물론 종교에 있어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해 아우구스투스의 오랜 정치적 동지 아그리파가 사망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를 선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차기로 임명했다. 그리고 서기 13년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하고 베스타 신전에 유언장을 봉인했다. 그 유언장에는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의 모든 지위와 권한을 물려준다고 적혀있었다.

이듬해 14년 아우구스투스는 사망했다. 로마의 실질적인 황제이자 향후 200년간 지속될 이른바 ‘팍스 로마나’의 황금 평화시대를 연 거인인 사라진 것이다. 그가 사망하자 원로원과 시민민회는 그를 신으로 승격한다고 선포했다. 이후 그의 모든 후계자인 로마 황제들은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첫 황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의 시조가 된 것이다.

▷#리더십1 | 절제와 기다림의 미학

역사에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는 실질적인 황제였지만 공화주의자로서의 면모 역시 잃지 않았다. 물론 제국 설립 후 공화파로부터 영리한 방법으로 원수정을 확립해 공화정의 가면을 썼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로마의 수호자’ ‘제국의 시조’로서 아우구스투스는 역사의 존경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 리더십의 미덕은 절제와 경청이다. 그는 불과 19세의 나이에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어 노련한 정적들과의 무려 14년간 내전을 거친 후 권력을 장악했다. 그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는 혈기 넘치는 젊은이의 모습이 아닌 노련한 정치 감각과 판단력 그리고 조정자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의 선대 카이사르도 갖지 못한 리더십이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이 같은 리더십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미완’이었기 때문이다. 실력도, 능력도, 군사력도, 돈도 부족했기에 아우구스투스는 이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기다리고, 인내하고, 절제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최종 목표를 잃지 않았다. 그 목표를 향해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한 발씩 내딛은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특권이 부여될 때 더 조심하고 뒤로 물러섰다. 원로원이 그에게 영구적인 집정관의 지위를 부여하거나, ‘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신격화’를 해도 오히려 이를 사양하고 자신의 권한을 내려놓는 조치를 취했다. 의심받지 않은 것이다. 카이사르의 암살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살아있는 교훈을 얻은 것이다. 완성의 마지막 단계, 성공의 정점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거나 머리에 관을 쓰지 않았다. 실질적인 권력을 존중했을 뿐, 권력의 완성품을 만들기 위해 적을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얼마나 조심스런 성격이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자신의 양아들로 후계자인 티베리우스가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다가 아우구스투스를 비난하는 의원들의 발언에 분노했다. 그러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젊은 너로서는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에게 분노하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과거 카이사르에게 했던 것처럼 칼을 들이대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지독한 인내와 절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리더십2 | 능력과 머리를 빌려라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카이사르에 비해 자신은 카리스마, 대중적 친화력, 정무 감각, 전투 지휘력 등 모든 분야에서 미숙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경쟁자 안토니우스에게 ‘무능력한 겁쟁이’라는 무시를 당할 정도로 군사 지휘력은 경험도 능력도 부족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강점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능력치를 정확히 알고 그 부족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유능한 인재를 영입해 보충한 것이다. 군대의 지휘와 내치는 아그리파, 외교, 문화, 교육 등은 마이케나스를 중용해 권한을 주고 그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했다. 후에 권력을 장악해서도 건강상의 이유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권한을 참모들에게 위임하는 대리통치를 즐겨 했다. 그로 인해 참모들의 실력도 검증하면서 다양한 인재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이런 아우구스투스의 리더십은 당연히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권력투쟁, 원수정 통치를 하는 40여 년 동안 단 한 명의 배신자가 없었던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인품도 한몫했지만 부하를 신뢰하고 그들의 조언을 경청하는 그의 리더십이 가장 큰 이유이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는 3번째 황후인 리비아를 매우 아꼈다. 그녀는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워 아우구스투스에게 조언을 하는 사실상의 1급 참모였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와 시민을 위한 조언을 얻을 수 있다면 비록 정치적 반대파의 따가운 비난도 마다하지 않았다.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혼자 가면 빨리 간다. 하지만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바로 아우구스투스에게 딱 들어맞는 말인 것이다. 황제로,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되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참모와 시민과 동떨어진 곳에 스스로 방치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과 같은 공간, 시대, 정신을 공유함으로써 1400년 존속할 수 있는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위키미디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591호 (17.08.1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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