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용 칼럼]노무현의 패스, 문재인의 러닝

박래용 논설위원 2017. 7. 31.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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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은 군사독재의 연장이었다. 김영삼·김대중 시대는 민주화 투쟁의 산물이다. 노무현의 시대는 대결 구도가 분명치 않았다. 노무현은 생각했다.

“나는 싸울 상대가 분명하지 않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목숨을 걸고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영웅이 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죽을 각오가 영웅을 만든다. 그러나 이 나라는 이미 민주화 투쟁을 하기엔 너무 진보했다. 내가 싸울 상대는 무형의 것이다. 그것은 제도이다. 정책이다. 제도의 합리화, 정책의 투명성이 내 싸움의 상대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것들은 내게 빛과 영광을 주지 못할 것이다.”(<참여정부, 절반의 비망록>)

노무현은 변화를 필요로 하는 구체제와 관행이 싸움의 상대라고 생각했다. 그는 집요하게 적폐를 두들겨 팼고 무너뜨리려 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노무현은 진보·운동권 성향의 어젠다를 밀어붙이려 했다. 국가보안법, 과거사, 언론개혁, 사립학교법 등이 대표적이다. 중요한 것들이었지만, 시민들의 생활고를 해결하고 눈물을 닦아주는 이슈와는 거리가 멀었다. 노무현의 주먹은 허공을 저었고, 빛과 영광도 얻지 못했다.

미식축구엔 양대 전술이 있다. 쿼터백이 전방의 자기편 선수에게 긴 패스로 공을 던지면 한번에 많은 거리를 전진할 수 있다. 패싱 플레이(passing play)다. 패싱 플레이는 실패의 확률이 높다. 패스한 공을 상대에게 뺏기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 바로 역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을 줄이기 위해 쿼터백에게 공을 받아 상대 진영으로 뛰는 플레이가 있다. 러닝 플레이(running play)다. 러닝 플레이는 한번에 긴 거리를 가기는 어렵지만 실패의 위험성을 줄일 수 있다. 패싱 플레이는 혁명적이고, 러닝 플레이는 개혁적이다.

노무현은 롱패스를 선택했다. 일종의 뻥축구 같은 것이었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지지자 다수연합을 만들어야 한다. 4대 개혁입법에 매달리는 롱패스 플레이는 오히려 반대파 다수연합을 만들어줬다. 시민들은 멀어졌고 반대파는 결집했다. 노무현의 언사는 비판자들의 감정을 더 자극하고 악화시켰다.

문재인 정부는 참여정부의 실패 원인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새 정부 출범 80일간을 살펴보면 참여정부 때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첫째, 롱패스 대신 러닝 플레이를 구사하고 있다. 노후 화력발전소 가동중단, 검찰 돈봉투 감찰, 세월호 기간제 교사 순직 인정 등은 짧지만 빠르게 달려가는 러닝 플레이다. 비정규직 제로, 탈원전, 부자증세 등 롱패스 이슈는 민생과 직결된 것으로 추렸다. 국가정보원·검찰·경찰 개혁은 먼저 스스로에게 맡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적폐청산 특위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요란하지 않되 효율적인 방법이다.

둘째, 개혁의 전사(戰士)가 다르다. 노무현 정부는 기존의 질서를 백지로 돌려놓고 재설계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를 위해 강금실, 유시민, 이창동 장관 등을 개혁의 전면에 내세웠다. 옳은 말을 싸가지 없이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박수도 받았지만 소음이 더 컸다. 문재인 정부는 차관을 국정운영 주력부대로 운영하고 있다. 전문성을 갖추고, 내부 소통에 능하고, 개혁 철학을 공유하는 실세 차관을 통해 기존 체제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문 대통령은 “차관이 국정운영의 중심이다. 실질적 부처 운영은 최고 전문가인 차관이 한다”고 했다. 실질적이면서 잡음도 없다.

셋째, 적폐청산을 개별 사건·특정 인물에 맞추지 않고 있다. 쇄신적 정책은 지지율 51%가 넘는 것만을 우선 추진하고 있다. 부자증세는 찬성이 80%를 넘는다. 최저임금 인상은 71%가 지지하고 있다. 원전은 위험하다는 인식이 54%다. 핀셋으로 뽑아내듯 시민 지지가 높은 개혁과제만을 추려냈다. 이런 어젠다들은 각 부처로 쪼개져 동시다발로 진행 중이다. 여권의 고위 관계자는 “지금은 부처별로 개혁과제들을 추진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가능한 한 청와대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알아서 굴러가게 하는 식”이라고 했다. 영악하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혁명은 모든 저항을 누를 수 있지만 개혁은 동의를 얻어야 한다. 기존의 정치·행정·경제질서를 재편하려면 구체제의 저항을 극복해야 하고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설득이 필수적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런 교과서적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듯하다. 싸움의 기술을 잘 알고 있다. 새롭게 형성된 시민 에너지도 있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문재인은 빛과 영광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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