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지라도 떠나지 못할지라도
[한겨레] 여름 휴가철을 맞아 작가, 출판인에게 읽을 만한 에세이를 추천받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 헨리 밀러, 프레데리크 시프테 등 묵직한 작가군의 작품들과 만난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만하다.
존재의 이사 꿈꾸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프레데리크 시프테 지음, 이세진 옮김/문학동네(2014)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대대적인 책장 정리를 했다. 책 욕심도 다 물욕이거늘 무슨 책을 이리도 사 모았나 반성하며 엄선해서 책을 고르는 한편, 이사라는 행위만큼 삶의 부피와 무게를 줄일 절호의 찬스도 없으리라는 생각을 새삼 했다. 물리적인 이사뿐만이 아니다. 삶이 지치고 버거울 땐, 고여 있던 과거를 흘려보내고 신선한 바람과 햇빛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 존재를 이사시키는 과정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존재 혹은 마음의 집을 이사시키는 일. 말이 쉽지 사실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언제나 복잡다단하고, 기억에는 문도 바닥도 없으니 말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남겨두어야 할까. 존재의 이사를 갈망하는 당신의 고민에 응답하는 책이 한권 있다. 엄선해서 꾸린 나의 새 서가에도, 가장 손이 잘 닿는 곳에 놓여 있는 책. 웬만한 자기계발서는 시시하다며 눈길도 안 주는 당신에게도 두고두고 읽힐 만한 빛나는 책.
그 책의 제목은 프레데리크 시프테의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이다. 프랑스의 한 고등학교에 철학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저자는 프리드리히 니체, 페르난두 페소아, 마르셀 프루스트, 미셸 드 몽테뉴 등 ‘삶에 질식당하지 않았던 10명의 사상가들’에게서 삶의 고통과 부조리에 맞설 문장들을 선별해낸다. 그러곤 그 문장들을 지표 삼아 존재의 여행길에 오른다.
이 책이 특별하다면 그건 단순히 유명인들의 문장을 열거해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장들을 자신의 삶 속으로 끌고 들어와 그 안에 녹여내는 능력에 있다. 이를테면 ‘페르난두 페소아’ 꼭지에서는, “언제라도 권태에 빠질 수 있을 만큼 느리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을 만큼 심사숙고하는 삶을 살라”라는 페소아의 문장이 자신의 삶과 어떻게 맞물렸는지를 설명한다. 작은 도시 비아리츠에서 아버지 없는 아이로 자란 자신이 어떻게 ‘불안’과 친구가 되었는지, 그런 자신에게 ‘책’은 어떤 의미였는지, 그 시간을 통과하며 지향하게 된 삶의 속도는 어떤 색과 모양의 ‘느림’인지에 대한 이야기들. 그런 내밀한 이야기 속에서 페소아의 문장은 포박된 검은 활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파도처럼 끊임없이 출렁인다.
평소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상관없다. 이 책의 저자는 당신보다 훨씬 더한 염세주의자일 테니까. 그런 저자가 건네는 이야기이기에 섣부른 희망보다는 정확한 진단이, 철학적 지식의 일방적 전달보다는 생생하고 내밀한 경험담이 함께하는 책이다. 존재의 이사를 꿈꾸는 히치하이커들에게 이 책은 톱니처럼 포개질 것이다. 안희연 시인
어떤 ‘사랑의 기운’ 충만한 여행기
미국여행기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백선희 옮김/열림원(2000, 절판)?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47년에 넉달 동안 미국을 여행했다. 마음이 꽤 어지러운 시기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만 39살이었고, 책을 몇권 냈지만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한 상태였다(<제2의 성>을 발표하기 2년 전이었다). 반면 그녀와 계약결혼 관계였던 사르트르는 스타 철학자가 되어 어린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1947년은 이전까지 세계의 중심이던 유럽이 미국에 그 자리를 넘겨주던 때이기도 했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의 상흔으로 신음 중이었고, 미국은 유럽에 구호물자를 보내고 있었다. 콧대 높은 프랑스 지식인들에게는 퍽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이었다.
동경심과 열패감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그녀는 미국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특정한 주제 없이 그날그날 느낀 것을 일기처럼 적는다. 그 기록이 이 책 <미국여행기>다.
보부아르의 표현을 빌리면, 그녀는 미국에 매일 사로잡혔고, 또 매일 실망했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의 화려함과 시카고 최하층 술집의 생기에 감탄한다. 반면 사회 전체에 깔린 듯한 얄팍한 낙관주의와 깊은 인종차별에는 진절머리를 낸다.
보부아르의 시선은 큰 것도 작은 것도 예리하게 포착한다. 찰리 채플린이 유명인사들 앞에서 으스대는 동안 우울한 표정으로 떨어져 앉아 있는 그의 아내를 그녀는 놓치지 않는다. ‘몇몇 우발적 성공이 아직도 자수성가라는 신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복권을 곧 당첨금과 동일시하는 기만과 다를 바 없다’며 사회가 점점 더 경직되어 감을 간파하기도 한다.
보부아르는 할리우드, 그랜드 캐니언,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고,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고,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호텔에서 대마초를 피운다. 그녀는 재즈에 빠지고, 젊은 미국 작가들과 새벽까지 영문학을 논한다. 그러나 흥분하는 법은 없다. 차분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읽다 보면 쓸쓸한 미소를 짓는 여인의 얼굴이 떠오를 것 같다.
이 책을 펼칠 때면 깊은 밤에 분위기 좋은 재즈클럽이나 바에 혼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조금 외롭고, 그런 동시에 조금 들뜨는. 보부아르는 이렇게 썼다. “내가 여기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열렬히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건 확신한다.”
이 책에서는 많은 인물이 이름 없이 그저 이니셜로만 등장하는데, 그 중 ‘N. A.’가 소설가 넬슨 알그렌이다. 보부아르는 미국에서 한살 연하의 이 남자를 만나 불꽃같은 사랑에 빠졌다. 책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어떤 ‘사랑의 기운’은 페이지 내내 충만하다. 장강명 소설가
어디로 떠나는가, 어디에 머물 것인가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달(2017)
바람에 심하게 몸 굽은 나무를 보았다 하자. 인문학자는 나무의 역사와 인간의 공생 관계를, 혹은 그 길의 유래를 이야기할 수 있겠고, 소설가는 나무가 서 있는 풍경과 바라보는 사람의 심리 묘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시인은 어떤가. “나무가 바람에 굽은 것처럼 인간 역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단련되기 마련이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신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다. 고통이 주어졌다는 것은 신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고. 맙소사. 이국의 길 위에서 만난 굽은 나무를 앞에 두고 시인은 고통을 느끼고, 삶의 안쪽으로 곧장 시선을 끌어당긴다. 신이 우리 곁에 지나가는 신호로 고통이 주어진 것일지 모른다고.
나희덕 시인이 길 위에서 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에는 이국의 여행지 풍경과 함께 사진도 담백하게 한두 컷씩 편집되어 있다. 슬몃 들춰보면 여행서처럼 보이지만 시적인 성찰로 가득찬 삶의 안내서다.
시인이 바라보는 것, 그 시선이 책의 속살이다. 이 산문집을 읽는다는 건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며 아름다움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명상하는 것과 같다. 어떤 시선인가 하면, 누군가 멀어지는 풍경,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는 눈의 방향이다. 산문집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는 머리말에 해당하는 시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이 열고 있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평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시인은 여행지 런던의 구름이 유난히 아름답다고 느꼈으나 돌아와서 보니 우리의 구름도 역시나 그렇더라고 했다. 구름의 차이가 아니라 하늘을 보고 지내는 시간이 많았기에 아름다움을 느낀 것이라고. 그동안 잃어버린 것은 구름이 아니라 구름을 바라볼 시간과 마음이었다고. 바르셀로나 구엘 공원 앞에서 아이들이 불며 노는 비눗방울을 “가우디가 남긴 웅장한 건축물에 비하면 참으로 가볍고 덧없는 꿈의 구조물이다. 하지만 그날 나는 비눗방울 속에 들고 싶었다. 숙박료 없는 그 투명한 방 속에”라는 소망을 기록한다. ‘숙박료 없는 그 투명한 방 속’이란 묘사를 얻은 비눗방울은 이제 내가 이전에 알던 비눗방울은 아니다.
여름에 어디로 떠나는가, 아니 어디에 머물 것인가. 나희덕 시인의 오롯이 아름다운 산문집에 덧댈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이 글의 몫이 청유형이라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위대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책?
그리스 기행
헨리 밀러 지음, 김승욱 옮김/은행나무(2015)
위대한 책 중에는 세상에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책들이 꽤나 많은데, 나는 이 책들이 위대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위대함이라는 것은 희소하고도 존귀한 것인데, 이 희소하고 존귀한 것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말이다. 헨리 밀러의 <그리스 기행>은 그런 책이다. 위대하나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책. 국내에 한정해 말한다면 그렇다.
이 책을 우연히 읽게 된 나는, 이 책을 발견하게 되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인생의 손실을 입었을지, 일어나지 않은 그 일을 상상하며 분해했다. 나는 별것도 아닌 것을 침소봉대하지 못하는 성격이고(‘못됐다’는 말이다), 더욱이 소설도 아닌 ‘에세이 따위’(진지한 문학주의자들의 표현을 빌린)에 위대하다는 찬사를 바치는 유가 아니다. 하지만 과장을 할 때는 해야 하고, 찬사를 바쳐야 할 때는 기꺼이 찬사를 바쳐야 한다. 이런 책을 만나는 일은 인생에서 굉장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1939년, 49살의 헨리 밀러는 9년 동안 살던 파리를 떠나 그리스로 가 9개월을 머문다. 코르푸에 살고 있던 작가 로렌스 더럴의 편지 때문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헨리 밀러에게 그리스는 “꿈꿔본 적도 없고 내 눈으로 보고 싶어 한 적도 없는 빛의 땅”이었다. 그리스 냉담자였던 그는 “꿈과 현실, 예술과 신화가 너무 예술적으로 섞여 있는 탓”이라며 그리스에 빠져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놀랍고 좋은 일들은 그리스가 아니면 지구 상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다.” 샌들을 신는다면 모래에 발을 델 정도라는 섭씨 50도쯤 되는 그리스 날씨 속에서 인간과 풍광이, 신성과 세속이, 묘사와 이야기가 폭발한다.
그의 말대로 그리스가 신들이 술에 취해 한껏 들떠서 만든 섬이기 때문일까? 헨리 밀러는 ‘레치나’라는 그리스 백포도주를 매일같이 마시며 이렇게 말한다. “허파에도 좋고, 간에도 좋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모든 것에 좋다.” 레치나가 그를 괴롭혔듯이, 레치나를 마시는 그는 나를 괴롭힌다. 그가 쓴 단어들이 춤을 추며 내 머릿속과 피부를 희롱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서 나는 잠시 거인이 된 느낌을 받았다. “철저하게 진정한 인간이 되면 누구에게나 거인처럼 대단한 면이 생”겨서가 아니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탔기 때문이다.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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