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은밀하고 교묘해진 동북공정의 현장을 가다

서은영 기자 2017. 7. 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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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의 산실 中 환런·지안
韓 요구로 '소수민족 지방정권' 문구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中 지정 해설사 "고구려 문명 중원에서 온 것"
올해부터 '中 지정 해설사 외엔 설명 불허' 방침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비정되는 중국 환인 오녀산성 정상에서 내려다본 혼강과 일대 환인분지. 환인댐 건설로 산성 서쪽의 고분군과 마을은 모두 수몰됐다. /서은영기자
[서울경제] 해발고도 806m의 산 아래로 옛 비류수로 추정되는 훈장강과 굽이굽이 강을 따라 발달한 평원이 내려다 보인다. 서문에서 999계단, 깎아지른듯한 산길을 따라 오른 이곳은 기원전 37년경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동명성왕)이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고 첫 도읍지로 삼은 환런의 오녀산성. 고구려의 초기 도성인 흘승골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가파르게 수직으로 솟아있는 험준한 형세로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지인데다 일단 자리를 잡고 나면 산 정상부에서 훈장강 연안의 환런분지가 한 눈에 들어와 적의 침입을 감지하는 데도 최적의 장소였을 것으로 점쳐진다. 지금까지도 경사가 완만한 동벽 남반부를 따라 인공성벽 일부가 남아 있는데 하단에 장대벽을 쌓아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쐐기형 돌을 얹은 다음 사이사이 돌을 끼워넣는 방식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것이 고구려 당시의 성 축조 기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평가다.

광개토대왕비에도 시조 추모왕(주몽)이 홀본 서쪽 산상에 성을 축조했다고 기술하고 있어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 하지만 오녀산성 일대를 흘승골성이나 졸본성으로 비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험준한 만큼 교통이 불편하고 물자보급이 힘든데다 100여명이 생활하기에는 활동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근거다. 이에 오녀산성은 군사방어와 의례용 성곽으로만 기능했거나 유리왕 3년에 천도한 국내성의 군사용 성곽이라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0여㎞ 떨어진 하고성자는 고구려 건국 초기 평지토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둘레 0.8㎞에 이르는 장방형의 토성이 이곳에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170m 가량 남은 서벽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유실됐다. 하고성자촌에서 1.5㎞ 남짓 떨어진 상고성자촌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200여기의 고분이 자리해 고구려 초기 도성의 위치는 물론 당시 생활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주요 자료가 됐겠지만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대부분이 파헤쳐 평지로 개간됐고 지금은 겨우 20여기만 남았다. 국가 지정 보존구역으로 지정됐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입구에 설치됐지만 무덤을 둘러싸고 지역 주민들이 각종 작물을 재배하고 있어 고구려 초기 적석총의 형태를 고스란히 띠고 있는 이곳 돌무지무덤군은 한갓 돌 무더기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다.

오녀산과 일대 탐방지역은 물론 이 일대에서 출토된 토기, 와당 등을 전시한 오녀산박물관에서도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 식으로 서술하는 안내문은 일제히 사라졌지만 고구려를 중국 역사의 한 갈래로 포섭하려는 전시 방식은 좀 더 교묘하고 은밀해졌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가령 오녀산박물관 내 광개토왕비를 설명하는 코너에서는 ‘삼국지’ 등 중국 측 사서에 기록된 고구려 관련 내용을 역사적 맥락 없이 발췌 전시하고 있다. 현지 조선인 가이드 김무열(가명) 씨는 “노골적인 설명은 사라졌지만 인용 자료를 모두 중국 쪽 자료로 꾸미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는 의미를 내포시키고 있다”며 “고구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외국인이나 중국인들은 전시를 보다 보면 고구려가 중국 왕조에 예속된 나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유리왕 3년에 천도한 국내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중국 집안의 장군총. 적석총 가운데 보존 수준이 가장 우수한 장군총은 현재 장수왕의 릉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인정되고 있다. 한때 무덤 위로 계단을 놓아 관광객들이 오르내릴 수 있게 했으나 현재는 계단을 제거했다. /서은영기자
중국 지안 장군총에서는 중국인 지정 해설사(왼쪽)의 설명만 들을 수 있다. 조선족 가이드가 자체 해설을 할 경우 경비(오른쪽)가 즉각 제지한다. 이는 지안시박물관, 광개토왕비 등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은영기자
중국 정부가 2000년대 초 동북공정을 시작하며 공을 들인 지역은 환인보다는 지안이다. 약 40년의 졸본시대를 마감하고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 국내성이 자리했던 도읍으로 추정되는 지안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만포와 마주하고 있는 도시로 환런에서는 차로 약 3시간 거리에 있다. 무려 420여년간 도읍을 두었던 집안 시내를 둘러싸고 고구려의 역사가 펼쳐진다. 시내에는 국내성터가 남아있고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통구하를 경계로 동편에는 국내성, 광개토왕비, 장군총, 서편으로는 마선 무덤떼, 칠성산 무덤떼 등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지안 지역에서는 한·중간 역사 분쟁이 여전하다는 사실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장소가 2013년 정식 개관한 지안시박물관이다. 이곳에서는 중국인 안내원을 제외하고 일체 설명을 금지하고 있다. 현지 가이드 자격증을 보유한 가이드 역시 중국인 안내원의 설명 내용을 그대로 통역·전달하도록 했다.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제지하며 급기야 퇴장을 시키기까지 했다. 현지 관광업계에 따르면 이 같은 방침은 올 초 정해졌다. 문서상 지침은 아니지만 단체 관광객들을 이끌고 이 일대 박물관과 장군총, 광개토대왕릉비 등 주요 유적지를 방문할 때마다 자체 설명을 제지했다는 것이 현지 가이드의 전언이다. 이날 박물관에서 지정한 중국인 해설사의 설명 역시 편파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가령 “고구려가 구석기 시대에 머물던 당시 중원은 철기시대였고 고구려는 자체 화폐가 없었다”든지 “네 귀퉁이 토기는 고구려인 자체로 제작 기술이 없었고 중원 지역에서 전해진 것이다” 등 대부분의 설명이 고구려 문명이 중원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시사했다. 물론 이 같은 내용은 구두상으로만 전해질뿐 안내문이나 팸플릿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장군총이나 광개토왕비 등에서도 단체를 인솔하는 가이드의 설명을 금지했다. 국내 관광객들을 주로 중국으로 송출하는 한 아웃바운드 여행사 대표는 “베이징, 상하이 등 대다수 지역에서는 현지 가이드 라이선스를 보유한 조선족이 직접 박물관이나 주요 유적지에서 설명하도록 허용하고 있다”며 “고구려, 발해 역사 등과 같이 일부 정치적 논쟁이 불가피한 내용이 담길 수밖에 없는 관광지에서는 비공식적인 지침을 내려 중국인 가이드의 설명을 일방적으로 통역하도록 하는 경우도 더러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환런·지안=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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