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름다워 슬픈 삶에 손 한번 얹어주고 싶어요"

2017. 6. 12.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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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그래도 속초다’ 정식 개인전 여는 김종숙 화가

‘속초다’의 화가 김종숙씨가 지난 3일 강원도 고성의 자택 화실에서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설명하고 있다.

“그날, 트럭에 그림들을 싣고 미시령 넘어 서울 가는 길, 나는 어쩌면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없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어쩌면 설거지, 우유 배달, 서빙…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더듬거리며 떠올려 보기도 했다. … 그림들을 내려놓고 돌아가는 트럭 뒤꽁무니를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그래도 난 끝도 없이 쓸쓸하고 틈만 나면 도망갈 궁리를 하고 한 달을 보냈다.”

두해 전 2월,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속초다-30년 은둔 화가의 첫 초대전’으로 화제를 모았던 김종숙(52·사진)씨가 뒤늦게 털어놓은 ‘생애 첫 전시회 소감’이다. 속초여고 동창생 2명이 몰래 그림을 들고 상경해 무작정 인사동 화랑가를 돌아다닌 끝에 ‘타의로’ 이뤄진 자리였다. 그렇게 내내 주저하고 겁을 냈던 그가 정식 개인전의 초대장을 보내왔다. 오는 14~27일 서울 서촌 갤러리291에서 ‘그래도 속초다’를 연다.

“다른 일 말고 그림만 그리며 살고 싶다”고 했던 그의 바람은 과연 이뤄졌을까?

2015년 ‘30년 은둔 화가의 첫 초대전’
정통 유화 ‘속초다’ 화제 모은 주인공
‘완판 기록’에 스스로 놀랐던 경험

“그동안 그림만 그릴 수 있어 행복했다”
2년간 밤낮·끼니 잊을 정도로 작업 몰두
내일부터 서촌서 신작 50여점 소개

“지난 2년 몇개월, 아무 잡념 없이 맘껏 그렸어요. 지금이 제 인생의 정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어요.”

외설악의 비경을 앞마당에 가득 품은 고성군 토성면의 붉은 벽돌 양옥집 화실에서 화가는 밝게 웃고 있었다. 평안도 실향민으로 전쟁 때 피난 내려온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정착해 일군 ‘제2의 고향’ 속초에 맞닿은 이 동네로 2년 전 옮겨왔단다. 그러고 보니 갓 나온 전시회 도록에 담긴 작품들도 많이 밝아졌다. ‘맨드라미’처럼 붉고 화려한 색감의 꽃 그림도 눈에 들어온다.

‘밤낮을 잊고 끼니를 건너뛴 작업 끝에 그는 삶의 높은 나뭇가지 끝에 아름다움의 집 한채씩 올려놓는다.’ 그를 가장 먼저 세상 밖으로 이끌었고 내내 작업을 지켜본 미술평론가 박인식씨는 “오로지 그리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다”고 평했다.

사실상 자발적으로 준비한 첫 개인전인 이번 전시회에서 그는 2년 전보다 더 많은 50여점을 선보인다. ‘나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도 준비해둔 눈치다.

“어릴 때부터 무작정 좋아서 그렸고, 대학 시절엔 운명에 반항하듯 그림을 멀리하기도 했고, 아무튼 젊은 날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방황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어느 날 ‘별 볼 일 없는 내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게 그림’이란 사실을 깨달았는데, 정작 그림으로 밥벌이를 할 정도의 자신감은 없었어요. 그래서 슬펐죠.”

행복해 보이는 그가 찾아낸 답은 뜻밖에도 ‘슬픔’이었다.

“살아 갈수록, 나이 들수록, 이 순간 나와 함께 숨쉬고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애처롭고 슬퍼요. 말로는 표현할 재주가 없으니 그리는 거죠.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삶에 손 한번 얹고 싶어요.”

김종숙 작가가 ‘그래도 속초다’ 전시 도록 중에서 작품 ‘공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자신 가장 마음에 든다며 도록에서 펼쳐 보인 작품은 누워 잠들어 있는 노숙자를 그린 ‘공원’이었다. 남루한 옷차림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얼굴과 손을 강조한 그림이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말해주는 듯하다. “그렇게 같이 숨쉬고 우는 허름한 뒷골목과 빈 가지의 나무와 들판. 그런 얘기를 하고 싶다”는 그는 “노가다처럼 그림으로 먹고 살아가는 게 내 업이니 열심히, 최선을 다해, 더 깊은 슬픔을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싶다”고 했다.

이처럼 세상에 당당히 ‘화가’로서 명함을 내밀 수 있게 된 김씨지만 그는 자신의 삶은 달라진 게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지난 초대전 때 “혹시 사기나 당하지 않느냐”며 믿기지 않아 했던 가족들의 걱정스런 시선을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긴 것쯤이 변화의 전부다.

하지만 2년 전 서울에 이어 속초에서도 전시를 했고, 속초시청에서는 그의 작품 ‘꼴뚜기’와 박인식씨의 ‘속초다’ 시를 함께 청사에 게시해놓을 만큼 지역에서도 관심을 받았다. 최근에는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 선생 10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는 단행본 <복사꽃 외딴집>(단비 펴냄)의 삽화를 맡는 등 ‘글과 그림’ 동호회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앤디 워홀을 보다가 벨라스케스를 보는 듯하다. 요시모토 바나나를 읽다가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기분이다. … 속초적인 너무도 속초적인 실향민의 삶은 그의 화폭에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이야기로 번안된다. 고향을 잃은 모든 사람은 내게로 오시오. 내가 당신을 위로해 드리리다.” 스스로 ‘속초’와 ‘김종숙의 그림’에 중독됐다고 밝히는 박씨는 “고전이 되어 오래도록 사랑받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고 예언했다.

속초/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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