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애 칼럼] 다시, 출연연에 희망을 건다
얼마 전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에 몸담고 있는 한 연구자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가 속한 연구기관이 있는 대전에 한 해외 연구자가 방문했는데, 대덕 연구개발특구를 둘러본 그 외국인의 반응이 매우 인상 깊었다는 것이다. 우주, 원자력, 핵융합, 화학, 기계, 생명공학 등 각 영역에 특화된 연구기관들이 반나절이면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반경 수 킬로미터 내에 모여 있는 것에 외국인 연구자는 감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1만명이 넘는 연구자가 연구비와 기관 운영비를 정부로부터 안정적으로 지원받는 구조가 수십년간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 무엇보다 놀라워했다.
그 외국인은 이런 지원을 받는 연구자들이 연구과제를 따내면 인건비 외에 과제수주 인센티브를 따로 받고 기관이 흑자경영을 하면 그 인센티브가 직원들에게 다시 주어진다는 사실도 흥미롭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같이 천혜의 환경을 갖춘 연구기관들이 각각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특구 안에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오가고 대화하는 공용 소통공간이 없다는 점에는 아쉬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출연연 현장에서는 목말라하는 정부 지원이 타국 연구자들이 보기에는 부러워할 만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얘기해주는 일화다.
다른 얘기를 잠시 하자면, 최근 한 연구기관장은 해외 출장을 계획하던 중 정부 관계자로부터 출장을 가지 말았으면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포기했다고 한다. 해외 연구기관과 연구그룹을 둘러보고 오는 것이 정부 관계자가 보기엔 외유성 출장으로 비친 것이다. 지금은 그만둔 과학기술 분야 한 기관장은 작년에 기관이 주관하는 한 해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출장일정을 잡던 중, 정부 관계자로부터 출발날짜를 하루 미루라는 얘기를 듣고 미뤘다가 행사 시간에 겨우 맞춰 도착해 숨 가쁘게 개막행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해외 연구자가 보기엔 정부의 탄탄한 지원을 받으면서 풍족하게 연구하고 있는 국내 연구자들이 활동 과정 곳곳에서 경험하는, 공무원들의 지나치게 살뜰한(?) 관리의 한 예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투자와 지원을 하되 관료들이 하나하나 간섭하는 우리 출연연 시스템이 이어지면서 연구현장은 안정된 속에서도 불만과 패배주의가 쌓여왔다. 연구지원은 계속 늘어나 연구비는 갈수록 풍족한데, 연구자는 뽑을 수 없도록 해놓다 보니 사람부족은 고질적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지원과 간섭, 투자와 관리의 불균형 속에 왜곡된 우리만의 출연연 구조가 굳어진 것이다. 정부는 열심히 투자하고, 연구자들은 저마다 몇개씩 연구과제를 수주해 열심히 연구하는데도 신명 나지가 않고, 연구성과도 신통치 않다. 연 4조~5조원을 쓰는 연구집단이 국가에 당장 필요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다는 지적과, 간섭은 줄이고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연구를 할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목소리가 계속 엇갈린다.
출연연에 경쟁체제를 만들기 위해 인건비 일부를 외부 과제를 따와서 충당하도록 한 연구과제중심제도(PBS)가 오히려 출연연이 목적과 역할을 상실한 계기가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부 과제를 딸 때마다 월급에 과제수주 인센티브를 추가로 받으니 연구자들이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을 두고 하지 않아도 될 과제까지 따내기도 한다. 훌륭한 연구팀이 과제수주 인센티브나 기술료 수익을 두고 갈등을 벌이다 갈라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연구 자체를 미션으로 생겨났건만 초심을 잊어가는 사례다.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출연연을 다시 들여다본다. 변화는 필요한데 섣부르게 바꾸려다간 부작용이 더 클 수 있어서 별다른 변화는 해내지 못해 왔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힘은 연구현장에 건설적인 변화보다는 반발과 파열음만 가져올 우려도 크다. 최근 몇년간 국가과학기술연구회와 출연연이 함께 해온 융합연구 확대와 출연연 혁신안 추진이 그래서 더 의미가 크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만 힘쓸 게 아니라 연구현장을 얽어매고 있는 온갖 구태와 과거 시스템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구회에 힘을 실어주고 출연연 기관장의 임기를 늘려 전문가가 소신을 갖고 기관 운영을 하도록 해줘야 한다. 지난 정권 말 권력 공백기에 출연연 인사와 경영은 더 매끄러웠다면 역설적으로 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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