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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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 박보영이 러블리의 결정체라면 실제의 박보영은 무던한 성격의 청춘이다. 영화 <과속스캔들>로 주목받았을 때도, <늑대소년>이 초대박났을 때도,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으로 ‘뽀블리’라는 별명을 얻었을 때도 그녀는 늘 덤덤했다. 인기를 체감할 틈도 없이 바쁘기도 했지만, 인기에 휘둘리지 않으려 스스로를 다독였다.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으로 ‘박보영 효과’를 입증한 요즘에도 마찬가지다.
“칭찬받는 게 어색해요. 저 스스로는 아직도 부족한 게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드라마가 인기 있고 사랑해주셔서 너무 감사하지만 이 또한 사라질 거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지금 인기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해요.”
<힘쎈여자 도봉순>에서 박보영은 선천적으로 어마어마한 괴력을 타고난 ‘도봉순’ 역을 맡아 시청자와 만났다. 연약해 보이는 작은 체구에 숨겨진 반전 괴력은 시청자의 흥미를 유발했다. 거구의 남자를 단숨에 제압하는 건 물론이고, 사이코패스와의 결투에서도 지지 않는 원더우먼 같은 캐릭터다. 박보영은 드라마 분야에서는 취약했던 JTBC가 한 단계 도약하는 데 힘이 됐고, 광고도 몇십 개나 추가 계약했다. 지금 가장 ‘핫’한 건 박보영이라는 말이다.
“생각지도 못한 큰 사랑을 받았어요. 아직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담스럽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그동안은 ‘내가 인기가 많나?’ ‘난 아직 부족해’ 하고 의문을 가져왔다면, 이번에는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커요. 다음 작품에서 잘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부담감이랄까요?”
괜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처했던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연출도, 방송사도 정해지지 않았을 때 오로지 시놉시스가 좋아 출연을 결정했던 작품이었다. 캐스팅이 자꾸 불발되고, 방송사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게 모두 자기 탓인 것 같아 애를 태웠던 작품이 바로 <힘쎈여자 도봉순>이다.
“대본이 재미있었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이 작품을 고집했어요. 그런데 남자 배우와 방송사를 찾는 데 2년이나 걸리더라고요. 모든 게 저 때문인 것 같았어요. ‘나는 아직 안 되는구나’ ‘내가 더 믿을 만한 배우가 된 후에 욕심을 부려야 하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죠. 그래서 시청률이 잘 나오는 것보다 무사히 완주하는 게 목표였어요. 그러다 보니 작품에 대한 애착이 형성됐죠. 지금은 ‘도봉순’을 보내는 게 많이 아쉬워요. 시원섭섭하달까.”
“시청률이 중요하진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작품에 대한 확신을 읽을 수 있었다. 독특한 캐릭터, 빈틈없는 대본에 대한 믿음 같은 거였다.
“사실 파격적인 판타지라 시청자의 호불호가 분명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상외로 반응이 좋았죠. 키도 작고 체구도 왜소한 여자애가 불의 앞에서 괴력을 발휘하는 꿈 같은 이야기에 공감해주신 것 같아요. 대리 만족이랄까요.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불의 앞에서도 물리적 한계 때문에 어떻게 하지 못하는 저를 보면서 힘이 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는데 ‘도봉순’ 캐릭터를 통해 그 한을 풀었네요.(웃음)”
<힘쎈여자 도봉순>을 이야기하면서 박보영과 박형식의 케미스트리를 빼놓을 수 없다. 협박에 시달리는 게임회사 대표와 경호원으로 만난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꽁냥꽁냥한 러브 라인을 선보였다. 더러는 두 사람이 실제 연인으로 발전하길 바라기도 했다.
“형식 씨랑 연애를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웃음) 형식 씨랑 지수 씨 모두 제 또래라 촬영 현장에서도 친하게 지냈어요. 틈만 나면 모여서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죠. 오죽하면 스태프가 슬쩍 와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보고 갈 정도였겠어요. 덕분에 케미스트리가 좋았던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저보고 애교가 많다고 하는데, 사실 형식 씨가 훨씬 많아요. 현장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도맡아 했죠. 형식 씨는 대단한 애티튜드를 가진 배우예요.”
박형식과의 달달했던 애정 신 몇 장면을 꼽았다. 박보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마지막 벚꽃 키스신을 기억하는 분이 많더라고요. 그 장면은 정신없이 찍었어요. 워낙 인파가 많은 여의도에서 촬영했거든요. 쳐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형식 씨랑 ‘빨리 하고 가자’고 했죠.(웃음) 형식 씨가 저한테 ‘나 좀 좋아해줘. 나 좀 봐줘’라고 하는 장면에선 저도 모르게 설레었어요. 남자가 직설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게 좋더라고요. 지금까지 저한테 ‘나 좀 좋아해줘’라고 말한 남자는 없었거든요.(웃음) ‘훅’ 하고 다가오는 남자, 왠지 멋있다고 생각했죠.”
상냥하고, 친절하고, 애교 넘치는, TV 속 박보영을 상상하면 오산이다. 남자친구 앞에선 애교라곤 없는 ‘상여자’가 된다.
“정신이 건강하고 밝은 남자가 좋아요. 제가 애교가 없으니 애교 많은 남자라면 생큐죠. ‘봉순이’는 어쩜 그렇게 간지러운 말을 잘할 수 있는지, 깜짝 놀랐어요. 실제의 저는 남자친구가 ‘집에 가’ 하면 진짜 집에 가거든요. 애교가 많지도, 감정에 솔직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대본 속 애교 덩어리인 ‘봉순이’를 보면 오글거렸죠. 부끄러운 맘에 ‘못 하겠어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쯤에서 박보영의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자. 2006년 영화 <비밀의 교정>으로 데뷔했다. 그때 나이 불과 17살이었다. 철없던 시절, 연기가 뭔지도 모른 채 연기했다. <왕과 나> <울 학교 이티> <과속스캔들> <미확인 동영상> <오 나의 귀신님> 등을 거쳐왔다. 작품 속에서 그녀는 늘 보호받았고, 사랑스러웠다. 덕분에 우리나라 대표 러블리 여배우가 됐지만 정작 그녀는 속앓이를 했다.
“사람들이 많이 기억하는 <과속스캔들> 속 저는 미혼모였어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삐뚤어진 어두운 캐릭터였죠. <늑대소년>에서도 병약하고 까칠했는데, 사람들은 저를 밝고 명랑한 아이로 기억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딜 가나 밝은 표정으로 웃어야 했어요. 저도 지칠 때가 있고, 짜증 날 때도 있는데 티 낼 수 없었죠. 솔직히 불편했어요. 한때는 저에 대한 이미지가 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이해되지 않아 사람들이 가진 고정관념을 깨려고 했어요. 빨리 어른이 되는 게 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부담스러웠던 사람들의 시선도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누가 알아보기라도 할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던 예전과는 다르다.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할 줄 아는 유연한 여배우로 거듭난 것이다. 박보영은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지금이 딱 좋아요. 배우 박보영과 인간 박보영의 균형이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요즘에는 산책도 자주 하고, 종종 서점에 가서 하루 종일 책을 읽기도 해요. 이 일을 하면서 잃는 것보다 얻는 게 훨씬 많다는 걸 알고 나서는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는 쪽으로 마인드가 바뀌었어요. 힘들다고 칭얼대는 저에게 친구가 ‘너는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잖아’라고 충고했는데 크게 와 닿았죠. 사실 저는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사는 연예인으로 제 또래보다 많이 벌고, 덕분에 편한 삶을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는 투정하지 않으려고요.”
여유로워 보였다. 순간순간을 즐기는 것처럼. 그녀가 단단해질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6~7년 전에 전 소속사와 분쟁이 있었어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일이었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그 시간이 제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됐죠. 이제는 웬만한 일엔 거뜬합니다.(웃음) 감정 연기를 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요.”
소속사와의 갈등은 그녀 인생에서 첫 슬럼프였다. 그 후로 몇 번의 슬럼프가 이어졌다. 활기차게 이야기하던 박보영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그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게 재미있었고, TV에 제가 나오는 게 신기해 연기를 시작했지만, 가면 갈수록 무엇을 위해서 연기하는지, 연기가 뭔지 모른 채 습관적으로 연기했던 것 같아요. 버티고 버티다가 정신 차려보니 여기까지 온 느낌이 더 컸죠. 어느 순간에는 슬럼프가 찾아왔어요. 더 이상 연기가 재미없어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려서부터 이 일을 해서인지 제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 심정, 아마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때의 저는 최악이었어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파이팅’하기까지 한참을 방황했어요.”
스스로에게서 오는 자괴감이 슬럼프의 이유였다. ‘왜 나는 연기가 늘지 않을까?’ ‘연기는 제자리인데 부담감과 책임감만 커질까?’ 하는 자책 같은 거였다. 언론과 평단, 대중이 박보영에게 환호할 때 그녀는 홀로 자신과 싸워왔던 것이다. 박보영은 영화 <돌연변이>를 통해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는 마음으로 연기하다가도 가끔 한 번씩 슬럼프가 찾아오곤 했어요. 그러던 중 <돌연변이>를 만났죠. 저예산 영화인 데다 역할이 크지도 않았는데 ‘아, 내가 이런 것 때문에 연기를 했지!’ 하고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어요. 스태프와 배우가 하나가 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또 사회적 문제를 꼬집는 스토리와 전개도 좋았어요. 제가 가진 달란트가 사회적으로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늘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방송사나 영화사를 구분 짓지 않고 시나리오와 대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됐죠. 작품이 괜찮다면 독립영화도 좋고 출연료가 적어도 좋아요. 근데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이 상업성을 좇아야 하는 상황이 올까 봐 걱정돼요.”
현장에서 늘 막내 역할을 도맡아 하던 그녀가 어느새 언니, 누나가 됐다, 그동안은 연기에만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현장 분위기까지도 세심하게 챙기고 배려할 줄 아는 배우로 성장했다.
“모든 작품이 배움의 연속이지만 <힘쎈여자 도봉순>은 여배우로서, 또 타이틀 롤이 가져야 할 자세와 덕목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작품이죠. 김원해 선배님에게 많은 걸 배웠어요. 연기에서만큼은 조금도 계산하지 않는 분이시거든요. 대사와 촬영 분량이 많든 적든, 한 장면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으시죠. 분량이 많다는 핑계로 중요한 신과 덜 중요한 신을 구분했던 저를 반성하게 됐어요. 스스로에게 ‘너 따위가 뭔데?’ ‘너도 참 변했다’ 하면서 혼을 냈죠. 선배님께서 한번은 ‘너랑 연기할 때 참 재미있어’라고 하시는데 울컥했어요. 그동안 힘들었던 게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감정이 복받쳤죠. 간신히 눈물을 참았는데, 집에 돌아가서 한참 울었어요.”
과거 기자의 질문에도 ‘네’ ‘아니요’ 등 단답형으로 말하던 박보영이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제는 어려운 감정 표현까지도 제법 할 줄 안다. 슬럼프가, 사람이, 시간이 그녀를 유연하고 단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서른 살의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요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에 빠졌어요. 어릴 땐 어린 게 싫어 빨리 서른 살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시간이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서른 살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되면서도 무섭거든요. 나이 먹어도 궁금증을 유발하는 여배우, 어떤 작품도 주저 없이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단 있는 여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보다 더 저를 사랑하고 아끼는 서른 살이었으면 좋겠어요. 바라는 게 너무 많나요?(웃음)”
박보영의 서른, 이만하면 기대되지 않는가.
에디터 : 이예지 | 사진 : 하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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