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칼럼] 적폐란 무엇인가
옛날 자격증 시험장의 만연한 부정행위
엄정한 감독을 오히려 비정상으로 치부
작은 잘못에 용인이 쌓여 관행이 된 것
대학시절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2학년이 되던 어느 봄날, 학과 사무실에서 해당 아르바이트 정보를 받아, 자격증 시험 감독을 하러 갔다. 신이 흩뿌려준 솜사탕 같은 구름을 보며 사뿐사뿐 걸어갔다.
종이 울리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작하기가 무섭게 수험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정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시험문제를 풀다가 유혹에 못 이겨 어쩌다 남의 답안을 슬쩍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당연하다는 듯 서로 답안지를 보여주고, 책을 꺼내 보곤 하였다. 그 뻔뻔함에 너무 당황해서 우왕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으나, 나는야 이제 성인식을 마친 대학생. 다 큰 어른답게 정신을 수습하고 부정행위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남의 답안을 보지 못하게 통제하고, 각자 시험 문제풀기에 집중하도록 부지런히 시험장을 오갔다.
이상하게도 수험생들은 이러한 시험 감독에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태도를 드러냈다. 마치 부정행위자는 자신들이 아니라, 시험감독관 바로 당신이라는 눈빛으로. 나도 이제 어른인데, 이토록 카리스마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처럼 권총이라도, 아니 헤어 드라이어라도 허리에 차고 와야 수험장의 기강이 잡히는 걸까. 어쨌거나 나는 수험생들의 뚱한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엄격히 시험 감독을 해나갔다. 결국 시험이 끝났고, 답안지를 걷기 시작했다. 답안지를 걷는 뒤통수로 수험생들은 소리를 질러댔다. 우우. 늑대들의 하울링(howling)이 수험장에 울려 퍼졌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호기심마저 생겼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도대체 왜들 그러냐고. 그들은 하울링을 멈추고 인간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말에는 그 나름의 이치(logos)가 깃들게 마련이다. 과연 수험생들은 “부정행위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건데 왜 상관이죠”라고 하거나 “우리가 다수니까 옳아요”라고 강변하지는 않았다. 대신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헛소리 태피스트리를 짜기 시작했다. 첫째, 지금껏 다들 이렇게 부정행위를 하며 자격증 시험을 치러 왔단 말이에요! 그건 ‘관행’을 통해 부정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논변이었다. 둘째, 오늘 다른 수험장에는 다들 이렇게 부정행위를 하며 시험을 쳤을 것이기 때문에, 마음껏 부정행위를 하지 못한 우리들이 결과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며, 따라서 당신의 시험 감독은 공정하지 못했어요! 이것은 독특한 ‘정의론’을 통해 부정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논변이었다.
그렇군. 태초에 부정행위가 있었으리라.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으리라. 그리고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부정행위를 눈감아 준 사람이 있었으리라. 부정행위를 눈감아 준 대가로, 부정행위를 저지른 이의 충성을 얻고, 그 충성에 기초해서 이득을 얻거나 권력을 누렸으리라. 그 과정을 지켜본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비슷한 거래에 동참했으리라. 그리하여 부정행위(弊)의 용인이 쌓이고 쌓이자(積), 그 적폐(積弊)는 관행이 되었으리라. 급기야는, 그 관행에 한통속이 되지 못하면 오히려 상대적 손해를 보게끔 되었으리라. 마치 자기 혼자만 교통질서를 지키다 보면 목적지에 남보다 늦게 도착하는 것처럼. 위장전입, 이중국적, 전관예우, 남발되는 자격증과 상(賞)... 그것들을 못하게 하면, 강변하는 거다. 다들 하는 일인데, 왜 나만 갖고 그래, 불 공 평 하게! 그리하여 마침내 부정행위가 관행을 넘어 정의의 반열에 올랐으리라.
시험 감독을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다 눈에 들어온 하늘의 구름은, 신이 건네준 솜사탕이 아니라 신이 흘린 게거품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시험감독 아르바이트에 응하지 않았고, 어른이 될 용기를 상당부분 잃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그런 난감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는 무익한 기간을 거쳤다. 그 기간이 끝나고 이 사회에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느낄 무렵, 어디로부터인가 적폐청산을 목표로 하는 정권이 등장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