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비정규직' 박사입니다
[경향신문] 박사는 2년 근무해도 기간제법 적용 못 받아… 임시직 비율 갈수록 늘어
서울의 한 사립대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ㄱ씨(37·여)는 벌써 10년째 비정규직의 쳇바퀴를 맴돌고 있다. 2006년 석사과정을 시작하면서 박사학위 취득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며 직장을 옮긴 횟수만 8번. 아직까지 2년 넘게 한 직장에 있어본 적이 없고, 때에 따라선 두세 달 단위의 초단기직으로 일한 경우도 여러 번이다.
지금 일하는 학교도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며 고용기간을 연장 중이다. 올해 말에도 그간의 업무성과 등을 평가받고 재계약을 해야 계속 머무를 수 있다. 박사학위를 가진 ㄱ씨의 경우 학교 규정상 2년 근무 후 재계약시 연봉을 올려줘야 한다. 올해가 근무 2년째인 ㄱ씨에게 비용문제를 이유로 정규직 연구원 채용을 꺼리는 대학 측이 연말에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 없다.
ㄱ씨는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에서 2년간 근무했지만 전망 등을 고려해 학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의 자율성도 높고 더 나은 미래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시작한 공부였지만 석사·박사학위를 따도 크게 나아지는 건 없었다. 석사를 딴 뒤에는 ‘2년 고용 후 정규직 전환’이라는 기간제법 조항에 걸려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 박사가 된 후에는 기간제법 적용을 안 받는 전문직이라는 게 문제였다. 기간제법 시행령에서는 ‘기간제근로자 사용기간 제한의 예외’로 박사학위 소지자를 의사·변호사 등과 함께 기간 제약 없이 고용할 수 있는 직군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박사급 인력은 정규직 전환에 대한 부담 없이 한 달, 1년 등 사용자 편의에 따라 마음껏 고용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는 “시행령 개정은 가뜩이나 불안정한 전문인력의 고용구조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는 노동계의 우려와 맞아떨어졌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실시하는 ‘박사조사’ 자료를 보면 2011년 재직 중이거나 취업이 된 박사 인력 중 상용직 비율은 71.6%, 임시직 비율은 14%였다. 반면 2016년 같은 조사에서는 상용직 비율이 66.2%로 줄었고, 임시직 비율은 21.8%로 늘었다. 그래서 박사급 전문인력들은 그나마 있는 ‘2년 후 정규직 전환’이라는 기간제법의 보호도, 기간제법 예외로 인한 혜택도 모두 얻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섬’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
박사급 전문인력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직장 자체가 턱없이 적다. 석·박사급 전문인력 채용정보사이트인 ‘하이브레인넷’의 신규채용정보란을 보면 비정규직 연구원을 찾는 곳은 공공기관, 대학, 기업 등 직장 유형을 가리지 않는다. 조건으로 내건 채용기간도 1년 내외의 단기 고용이 대부분이고, 어쩌다 있는 정규직 자리도 채용인력이 많아야 2~3명 정도로 기회가 지극히 제한적이다.
특히 전문인력 상당수가 학위 취득 후 주로 근무하는 대학의 경우 비정규직 고용실태가 심각하다. 2016년 박사조사에서 직장에 재직하지 않고 ‘학업에 전념한’ 박사 취업자 중 54.6%가 대학에 재직 중이다. 대부분이 연구나 강의를 전담하는 교직원으로 채용되거나 정부나 기업 등과 연계된 학내 산학협력단 등에서 일한다. 반면 대학알리미 사이트 자료를 보면 지난해 전국의 4년제 대학 교직원 중 비정규직 인력이 40%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10곳 중 3곳(33.5%) 이상이다. 산학협력단 근무인력의 근속연수가 2년 미만인 대학도 전체 206개 대학 중 절반이 넘는 112개에 달한다.
정부가 출연해 만든 연구기관들도 비정규직 비율이 높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국감에서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16년 6월 기준 국가과학기술연구회와 소속 출연 연구원 25개의 직원 총인원 1만5712명 중 비정규직은 3830명으로 전체의 24%를 차지했다. 같은 자료에서 2016년 1~6월 중 이들 출연 연구원이 신규채용한 직원(801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534명으로 무려 67%에 달한다.
전문인력 내에서도 출신대학, 해외학위 여부 등에 따라 차별이 심하다. 과거 과학기술분야의 한 출연 연구원에서 일했던 ㅇ씨는 “그나마 투명하다는 정부 출연 연구원의 정규직 연구원 자리도 부모나 친인척 등의 배경, 과거 지도교수와의 학연 등에 따라 채용이 좌우된다는 소문이 많았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학 교수는 “전문인력이 실무를 쌓기 시작하는 ‘박사후과정(포닥)’만 봐도 같은 값이면 국내보다는 해외학위 소지자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며 “일부러 해외에서 포닥을 하는 ‘스펙’을 쌓고 유턴하는 전문인력도 상당수”라고 밝혔다.
여성 전문인력의 경우 더 많은 차별과 수모를 겪는다. 지난해 국감에서 더불어민주당 유승희 의원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16년 7월 기준 정부 출연 연구원의 정규직 연구인력 중 남성은 9385명으로 87.5%인 데 비해, 여성은 1344명(12.5%)으로 적었다. 반대로 비정규직 비율은 여성 연구인력이 50.5%로 남성(20.5%)보다 훨씬 많았다. 직장 내에서 성추행이나 성희롱을 겪는 경우도 빈번하다. ㄱ씨는 “정규직인 남성 상사로부터 일상적인 반말과 신체접촉을 당하기 일쑤고, 회식자리에서의 포옹 등 불쾌한 기억이 한둘이 아니다”라며 “상급자가 입에 담기도 민망한 성희롱 발언을 해서 기겁한 적도 많다”고 밝혔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조국을 등지고 해외로 떠나는 인재들도 늘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이 발표한 ‘2015년 이공계 인력의 국내외 유출입 수지와 실태’ 보고서 집계를 보면 외국에서 취업해 한국을 떠난 박사학위의 이공계 기술인력 수는 2013년 기준 8931명으로, 2006년(5396명)에 비해 65.5%나 증가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이 매년 발간하는 ‘세계인재보고서’에서 조사대상 국가 61개국 중 한국의 ‘두뇌유출지수’는 지난해 46위로 바닥권이다. 두뇌유출지수가 낮을수록 해외로 빠져나가는 인재가 많다는 뜻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송창용 선임연구위원은 “정부가 박사급 전문인력에 대한 적절한 고급인력 정책의 수립, 교육환경의 파악, 교육 투자의 효율성 제고 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홍준표 “한동훈 면담 두 번 거절…어린 애가 설치는 게 맞나”
- ‘성 비위’ 논란 박정현 교총 회장, 제자에게 “나의 여신님” “당신 오는 시간 늘 떨렸다”
- 손웅정, 아동학대 혐의 피소 “사랑이 전제되지 않는 언행과 행동은 결코 없지만 반성하겠다··
- 단속 경찰, 성매매 업소 몰래 녹음·촬영···대법 “적법한 증거”
- [단독]대통령실, 비서관 5명 대거 인사 검증···박성중 전 의원 과기부 장관 유력 검토
- 정부·여당 뜻대로 했으면…‘화성 참사’ 아리셀, 중대재해법 피할 뻔했다
- ‘완득이’ ‘우동 한 그릇’ 연출한 원로 연극인 김동수 별세
- 사파리 구역서 조깅하던 30대 여성, 늑대들에 물려 중상
- ‘손흥민 부친’ 손웅정, 아동학대 혐의 피소 “사랑 전제되지 않은 언행과 행동 없었다”
- 폭스바겐, 전기차 리비안에 7조원 투자···시간외 주가 50% 폭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