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비문 분석 해보니 정교한 설계도와 같은 명문

임기환 2017. 5. 25. 15:0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광개토태왕비문 1면 주운태 탁본. 비문의 첫머리를 건국신화로 시작하여 고구려 역사의 신성함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고구려사 명장면-20] 보통 광개토왕비문에서 정복기사, 전쟁기사에 많이들 주목하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당대 고구려인의 의식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기사도 적지 않다. 이 글에서 살펴보려는 역사관도 그런 내용 중 하나다. 고구려인들은 어떤 역사관을 가졌을까? 그들도 오늘 우리들처럼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으려고 했을까? 우리들이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을 통해 자부심을 갖고자 하듯이, 그들도 자신의 역사에서 긍지를 가졌을까?

광개토왕비문에는 과거-현재-미래에 해당하는 '시제(時制)'들이 문장 곳곳에 사용되고 있다. 비문 문장이 광개토왕의 업적을 부각하기 위해서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는 점을 고려하면 비문의 시제 구성 방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광개토왕비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 비류곡 홀본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 추모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龍)머리를 딛고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셨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비문의 1부에 해당하는 위 문장은 전체가 과거-현재-미래의 시제 구성을 하고 있다. 첫 문장은 시조 추모왕(주몽왕)의 탄생과 건국을 담은 건국신화로 시작하여 2대 유류왕(유리왕)와 3대 대주류왕(대무신왕)으로 이어지는 왕실 계보를 기술하고 있는 과거 시제다. 즉 광개토왕의 혈통적 정통성, 나아가서는 천(天)과의 연결성을 통한 고구려 역사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기술이다. 다음은 17세손인 광개토왕의 즉위와 훈적, 사망 기사가 이어지는데 이는 곧 현재 시제다. 그 뒤를 잇는 문장은 비를 세워 광개토왕의 공훈을 후세에 전한다는 미래 시제를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1부의 문장 전체는 시제상으로 볼 때 고구려의 과거(건국 및 초기 3왕의 훈적)-현재(광개토왕의 훈적)-미래("후세에 전한다")라는 시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장 구성을 하고 있다. 비문 내에서 현양하려는 주인공인 광개토왕의 치세가 곧 '현재'다. 이 현재를 중심으로 고구려 역사의 '과거'와 '미래'를 연관 짓는 문장 서술 방식이다.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을 연대기로 기술하고 있는 2부의 문장은 시제 구성에서 독특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대부분 기년(紀年) 기사인데, 어떤 기사는 과거, 현재, 미래 중 2개 이상의 시제를 포함하고 있고, 어떤 기사는 현재 시제만을 기술하고 있다. 왜 이렇게 구분하였을까?

유명한 신묘년조 기사를 포함하여 영락 6년조 문장을 살펴보자. "백잔(백제)과 신라는 옛적부터 속민(屬民)으로서 조공을 해왔다"라는 과거 시제가 먼저 등장한다. 그 뒤에 신묘년조 문장이 이어지고, 다시 영락 6년 백제정벌전 기사가 이어진다. 이 부분은 광개토왕 당시의 군사 행동을 보여주는 현재 시제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는 백제왕이 "이제부터 앞으로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미래 시제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다음 영락 20년 동부여 정벌 기사도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동부여는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었다. 이는 과거 시제다. 이어서 언젠가부터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지 않아 광개토왕이 정벌하고 은덕을 베풀었으며 5압로(鴨盧)가 왕의 교화를 따라왔다는 현재 시제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 위 문장들의 과거 시제처런 과연 백제와 신라, 동부여가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을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백제는 4세기 후반 이후 광개토왕대까지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면서 서로 승패를 주고받았던 대상이다. 신라는 377년과 382년(혹은 381년)에 고구려의 도움으로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한 사례에서 보듯이 고구려가 신라의 외교 활동에 다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볼 수는 있으나 당시 양국 관계를 속민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속민은 조공(朝貢)을 전제로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문에서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예부터 속민"이라는 표현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광개토왕의 정벌 명분으로 제시하기 위해 설정된 허구다. 오히려 광개토왕의 군사활동을 통해 백제와 신라, 동부여는 고구려에 '속민'의 지위와 같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상황을 과거 상황으로 소급 적용하여 정벌의 명분으로 삼는 기술 방식이다.

이와는 달리 현재 시제 즉 광개토왕에 의한 정토만 강조되는 문장도 있다. 영락 5년조의 비려(稗麗) 정벌, 영락 10년조와 14년조의 왜(倭) 정토, 영락 17년조의 후연 정토 등에 대한 기사다. 영락 17년조의 대상을 백제로 보는 견해가 다수지만 필자는 후연으로 본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2부 정토 기사에서는 다양한 대상이 등장하는데, 현재 시제만으로 정토 내용을 기술한 대상은 비려, 왜, 후연 등이며, 과거와 현재 시제를 통해 광개토왕의 정토 명분을 부각시키는 대상은 백제, 신라, 동부여 등이다. 이렇게 비문 문장의 시제 구성이 정토 대상 성격에 따라 차별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후자인 백제, 신라, 동부여는 고구려 천하관의 구성 대상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니 다음에 다시 살펴보도록 한다.

그러면 왜 백제와 신라, 동부여의 경우에만 "예부터 속민(舊是屬民)" 등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고구려의 천하 즉 태왕의 은덕을 베푸는 대상이 단지 광개토왕 당대에 광개토왕의 무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광개토왕의 조상들에 의해 구축된 천하 질서 속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고, 광개토왕은 이를 다시 복원하는 업적을 쌓았다는 식의 서술법이다.

즉 광개토왕 자신만이 아니라 광개토왕까지 이어지는 고구려 왕실 전체의 정통성을 드러내려는 서술로 짐작된다. 광개토왕 무훈의 역사적 정통성을 구축하려는 의도를 읽어볼 수 있으며, 이런 문장 구성으로 이전의 역사를 계승하면서 현재의 과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군주로서 광개토왕의 위상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광개토왕비문의 시제 기술은 고구려인의 역사관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는 광개토왕 조상들의 영광과 신성함이며, 현재 시제는 그러한 과거를 계승하여 구현하는 광개토왕의 훈적이다. 광개토왕의 훈적을 후대에 전하려는 미래는 현재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미래는 새로운 현실의 구현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연장과 유지라는 인식으로 읽어볼 수 있겠다. 광개토왕의 훈적을 매개로 하여 '과거'의 신성한 전통이 광개토왕에 의해 계승된 '현재'가 후세에도 이어지는 상황이 고구려인이 전망하는 '미래'다.

고구려인의 시간관, 역사관에서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현재-미래에 흐르는 발전의 관념은 찾아볼 수 없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현재, 현재의 연속인 미래라는 역사관은 의고적인 측면도 있다. 그렇지만 과거-현재-미래의 맥락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고구려인의 역사의식은 과거를 되돌아보기를 게을리하고 미래를 고민하기보다는 당장의 현실에만 집착하는 오늘 우리에게 적잖은 교훈을 준다.

더욱 시제를 통해 잠시 살펴보았듯이 광개토왕비문은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구성된 매우 짜임새 있는 문장이다. 구석구석 허투루 쓰인 단어와 문장은 없다. 단어와 단어들이, 문장과 문장들이 서로 의미를 긴밀하게 연관 짓고 있는 명문장이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들은 비문을 우리식대로 보고, 보고 싶은 면도 본다. 명문장을 오독하고 있지 않을까 반성할 일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