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민의 내 인생의 책] ④ 에티카 | 바뤼흐 스피노자
[경향신문] ㆍ읽고 느끼면 족한 책

언제부터였을까? 우리 집 책장에는 1970년대 초반 일본의 가와데쇼보(河出書房)에서 발간한 <세계의 대사상> 시리즈가 이가 빠진 채,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모두 어딘가로 사라지고 두세 권만 남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스피노자의 선집이었다. 빠져버린 이 속에는 마르크스나 레닌 등도 있었던 듯하니, ‘스피노자’는 어쩌면 많은 사연과 기억을 간직한 채 묵묵히 살아남은 것이었으리라.
처음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언젠가 저 책을 꼭 읽고 말겠다는 다짐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결국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기 시작한 것은 40대 후반의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 스피노자에 관한 책들이 여럿 나왔고 그중 두어 권을 읽어보다가 차라리 원전을 직접 읽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선행지식을 갖고 펼쳐들었건만 <에티카>의 서술구조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공리에 정리, 증명, 따름정리로 이어지는 수학책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전개가 다름 아닌 철학책에서 차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300년도 더 전에 쓰인 책의 형식논리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견뎌내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종이를 펴놓고 개념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요약하면서 따라 읽어도 엄밀한 논리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저 눈에 띄는 단락 하나를 읽고 그 의미를 내 나름대로 되새기다 보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다. 특히 인간의 다양한 감정에 관해 분류하고 분석하는 부분은 압권이다. ‘도대체 신(혹은 정의)이 있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라는 개인적 회한, 사회적 비분강개를 차분하게 식히며 돌아보는 데도 도움이 된다. ‘누가 어디에서 이렇게 말했다’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책도 있지만, 그런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책도 있다. 요컨대 읽고 느끼면 족한 책, 적어도 내게는 <에티카>가 그렇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속보] 김정은, ‘중 서열 4위’ 왕후닝과 회담 후 단둥 떠나···“북·중, 신압록강대교 계기 경
- “K드라마 보고 한국 왔는데, 일본 여행보다 불편”···외국인 관광객 발목 잡은 ‘번호 인증·
- 넷플릭스 한국 진출 10주년, 이정재 “‘한국인이라 자랑스럽다’는 말 가장 와 닿았죠”
- 이태원 참사 4주기 추모식서 고개 숙인 한성숙 총리 “다시 한번 깊이 사과···진상 명백히 밝힐
- 태풍 ‘참피’ 북상에···제주·남해안 풍수해 위기경보 ‘관심→주의’ 상향
- 예산 삭감에 쪼그라든 순직 소방관 추모식···‘소방 빨대’ 사과한 추미애 “처우 개선 약속”
- “46세에 현역이라니, 역시 외계인”···‘브라질 축구 레전드’ 호나우지뉴, 다음달 11년 만에
- 전도연도 선택한 짧은 앞머리 ‘베이비뱅’… 자를까 말까 고민된다면
- 출생신고도 없이 사라진 아이 126명···경찰이 수사하고도 못 찾았다
- “한탕해서 이 동네 뜬다”… 대마초 키우는 세 여고생의 위험하게 푸르른 청춘[오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