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오늘]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어록으로 보는 그의 삶

이진선 PD dora@kyunghyang.com 2017. 4. 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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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 472주년이다.

이날은 이순신 장군의 우국충절(憂國忠節)에 대한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정부가 제정한 공식 기념일이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순신’의 의미는 남다르다. 어린 시절 누구나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 업적, 어록 등을 접하며 그의 충의 정신을 헤아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그가 남긴 어록은 지금 세대의 입에서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2014년 7월 개봉한 영화 <명량>과 2016년 11월 방송된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 ‘위대한 유산’에서 이순신 장군의 삶을 조명한 영향도 컸다. 많은 이들이 충무공에 대해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라는 명언을 떠올린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말에는 그의 강직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을 맞아 그가 남긴 어록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장우성이 그린 충무공 이순신 표준 영정. 한국문화중앙연구원

1572년(선조 5년) 28세가 된 이순신은 처음으로 훈련원에서 실시하는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했다. 그가 시험 도중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졌음에도 버드나무껍질을 벗겨 상처를 싸맨 후 시험을 마치는 투혼을 보인 것은 유명한 일화다.

4년 뒤 그는 무과에 합격한 뒤에도 세상이 자기를 알아줄 때까지 묵묵히 자기 일에만 충실했다. 이순신은 높은 사람의 힘을 빌려 출세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군인 생활 초기에는 진급이 늦은 편이었다. 그가 뛰어난 실력에도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한 것을 보고 많은 측은히 여겼다. 이에 이순신은 이렇게 말했다.

“사나이 세상에 나서 쓰이면 충성으로써 죽음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않는다면 들에 내려가 밭갈이 하는 것도 족하다” 1594년 4월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해 경상우수군과 합세해 적을 무찌르라”라는 서장을 받았다. 그는 소속 오관오포에 동원령을 내리고 29일 여수 본영에 모여 출전 준비를 마쳤다. 전라우수군과 함께 출전하려 했으나 이미 일본군의 북상이 너무나 빠르게 진행됐다. 결국 이순신은 5월 4일 첫 새벽에 전라좌수군만으로 24척의 판옥선,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등 모두 85척을 거느리고 경상도로 출전했다.

출전을 앞두고 탈영병이 생겨났다. 일본군에 대한 정보도 없고 경상도 바닷길에 어두운 상황에 병사들의 긴장감은 계속 커졌다. 이순신은 적선과 맞부딪쳤을 때 병사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명령 없이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신중하라(勿令妄動 精重如山)” 1597년 2월 6일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조정을 기망하여 임금을 무시한 죄요, 적을 놓아주어 치지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요,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모함하기까지 하며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가 있다고 전했다.

이때 우의정 정탁이 이순신을 구명하는 글을 썼다. 그의 글에는 임금이 이순신을 버리고 원균을 다시 높여 기용하려는 마음을 읽고 그에 맞추기 위해 원균을 같이 높이면서 이순신을 변호하는 노련함이 보인다. 이에 이순신은 풀려나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도록 명을 받았다.

전라좌수영 본영이 있는 여수에 머물고 있던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변씨는 아들이 전라좌수사에서 해임되자 본가인 아산을 향해 배편으로 서해를 돌아 올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4월 11일 그는 결국 아들을 보지 못하고 배 위에서 임종했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이순신은 슬픔에 통곡했다.

“나라에 충성을 바치느라 했건만 죄가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했건만 어버이마저 가버리셨다” 1597년 9월 무렵 조정은 수군이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이순신에게 “육전(陸戰)에 힘쓰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수군의 역할을 강조하며 승리에 자신감이 가득 찬 장계를 올렸다.

“저 임진년으로부터 5~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바로 찌르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있사온데, 죽을 힘을 다해 막고 싸운다면 지금도 역시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만일 수군을 전폐한다면 이는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일일뿐더러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터인데 신은 그것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않은 이상 적들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1597년 9월 14일 육지에서 “적선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먼저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는 정탐 보고서가 왔다. 적의 대규모 공격이 임박한 가운데 이순신은 진을 전라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물살이 빠를 때는 큰 배들까지 떠내려 갈 정도가 되는 울돌목(소리를 내어 우는 바다 길목)이었다. 그날 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결의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다스려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한다. 이순신 54세 되던 해였다.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이진선 PD dor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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