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산책] 혁신은 '전통'에서 싹튼다

2017. 4. 2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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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명품 거리에 위치한 샤넬의 크리스털 하우스는 최근 가장 주목받는 건축물 중 하나다. 2017 건축상 수상작 중 하나로 선정됐다는 소식도 들려올 정도로, 매우 혁신적이고 독특한 외형의 건축물이다. 올해 초 국내의 한 매체에도 소개된 바 있다. 이 건축물의 외관 중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그것의 전면부다. 유리블록과 전통적인 테라코타 벽돌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형태는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교차하는 느낌을 준다. 유리블록과 벽돌의 교차는 흡사 시간의 흐름이 한 켜씩 쌓여가며 변화하는 듯하다. 건축가 승효상의 표현을 빌리자면, 터의 무늬가 새겨진 듯하다.

허황되거나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을 일러 터무니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 속의 '터무니'는 원래 '터무늬'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터 위에서 인간의 삶이 펼쳐지며, 그 터에는 그 삶의 흔적이 나이테처럼 쌓여가게 된다. 그처럼 삶의 시간들이 차곡하게 쌓여간 것이기에, 터의 무늬는 외형상의 모습이 아닌 우리의 기억과 역사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한 터 무늬의 소실은 근원적인 삶의 기억과 역사의 상실이다.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을 인문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는 무장소성(placelessness)이라 표현한 바 있다.

터의 무늬가 지워지는 무장소화의 경험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일반적인 거주 양식이 되어버린 대단위 집단 거주지가 생겨나기까지 지속적인 무장소화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신도시나 뉴타운 등의 각종 개발 및 재개발 사업들은 일반적으로 기존의 터를 무화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오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개발과 재개발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간 속에서 살아가기에, 모든 것이 오래되고 낡게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불편은 감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수용해 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인위적이고 수고로운 변화가 필요한 이유다.

산업화 시대 이후 우리가 택해 온 방식은 대개 한 지역을 집중적이며 전면적으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90년 대 중반 서울시에서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었던 한양주택은 몇 년 후 진행된 은평뉴타운 사업으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오래되고 낡은 것은 오래되고 낡게 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것 역시 하나의 변화였고, 더욱이 가치가 없었다면 진즉에 버려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되고 낡았다고 무조건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는 것은 아니다. 변화의 필요성이 변화의 방식 모두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혁신은 그 같은 변화의 또 다른 표현이다. 혁신이 과제라면, 전통은 문제다. 전통이 혁신의 대상인 한, 그 전통은 새로운 것으로 대체돼야 할 낡고 낙후한 것일 따름이다. 하지만 시간 속에서 새로움과 낡음은 연속선상에 있을 따름이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가 그러하다. 우리는 그 시간들이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며, 우리 안에서 그 시간들은 조화되고 융화되고 응축된다. 암스테르담의 혁신의 의미를 잘 살펴야 하는 이유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크리스털 하우스도 건축의 혁신이었다. 독특한 것은 자신들의 혁신을 '시적인 혁신(poetic innovation)'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들에게도 혁신의 대상은 전통유산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통유산을 없애는 방식으로 혁신을 수행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혁신에는 '시적'이라는 의미가 덧붙여졌으며, 이로부터 그들의 혁신은 조화와 융화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최첨단 유리 기술을 선보이기 위해 그러한 건축을 시행한 것은 아니었다. 유리 기술은 그들의 혁신을 위해 도입된 것일 따름이었다. 그들이 먼저 주의를 기울인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전통 건축의 유산과 지역성이었다.건축가의 가장 큰 고민은 전통적 건축 요소들의 상실이었다. 주변의 많은 건물들에서 이미 그러한 요소들은 상실되었던 터였다. 이 상황에서 건축주에 대한 건축가의 제안은 사라질 것들을 불러와 그것을 펼쳐내자는 것이었다. 만듦의 의미에 대한 생각, 그것이 바로 시적 혁신의 출발이었다. '시적'은 단지 자신들의 작업을 꾸미기 위해 사용된 말이 아니었다. 그 시적 혁신은 그들의 작업 전체를 규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적(poetic)이라는 말은 본래 고대 그리스어 포이에시스(poiesis)에서 유래되며, 그 뜻은 시를 짓는 것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였다. 만듦의 의미를 성찰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혁신의 또 다른 길의 가능성, 즉 시적 혁신의 길이 마련된 계기였던 셈이다. 그들의 건축 기술적 고민은 여기에서 새로 시작됐으며, 건축 기술의 핵심이 된 유리블록 제조사인 베니스의 포에시아(Poesia)와의 협력 역시 이 과정에서 이뤄질 수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샤넬 크리스털 하우스에서 혁신은 결코 전통의 배제가 아니라 그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재창조의 방식으로 전통은 혁신이 되고, 이 혁신은 곧 하나의 새로운 전통이 됐다. 혁신(innovation)이 곧 전통(classic)이 되는 셈이며, 이로써 역사의 무늬는 다시 쌓이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혁신의 의미를 인간의 일에도 적용시켜 볼 필요가 있다. 4차 산업혁명 역시 하나의 혁신이라면, 이제 인간의 일도 터의 무늬처럼 그 무늬를 새겨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술만이 아니라 인간의 일의 의미를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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