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진화, '세종실록'의 영역(英譯)과 간행

2017. 3. 30.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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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어떤 두 언어, 이를테면 한국어와 영어를 서로 번역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몇 세기 전 ‘society’나 ‘philosophy’라는 단어와 처음 마주친 동아시아인의 느낌은 어땠을까? 그것이 ‘사회’나 ‘철학’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기까지 거쳐야 했던 과정은 캄캄한 미지의 동굴을 헤쳐 나오는 모험에 견줄만한 실패와 성취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라틴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이뤄진 성서 번역, 그리스 고전의 아랍어 번역, 인도 불경의 한역(漢譯), 근대 일본의 란가쿠(蘭學)가 수행한 서양어 번역 등은 그런 노력의 빛나는 진경(珍景)들이다.

이런 위대한 업적들과 견주기는 어렵지만, 2012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영문판 보급사업도 그런 지식의 교류와 소통의 노력을 잇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시도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이 사업은 그동안 언어의 장벽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역사권에서만 주로 이용되었던 실록을 가장 대표적인 국제어인 영어로 번역해 공개함으로써 활용의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다. 한국학 연구의 지평과 수준도 이 사업의 진행과 함께 상당히 확대되고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주요 한국학 용어의 영문 표기를 마련해 표준화하는 것도 이 사업의 주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다.

이 사업의 시간표는 크게 두 단계로 짜여 있다. 2012년부터 2022년까지의 1단계에서는 세종실록의 편년 기사를 모두 번역하고(오례, 지리지, 칠정산은 제외) 2023년부터 시작할 2단계에서는 나머지 왕대 실록에서 주요 기사를 선별해 번역할 계획이다. 사업 종료 시점은 미확정이다. 세계화가 촉진되면서 최근 국내에서 주요한 사료와 연구성과를 영역해 보급하려는 노력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우리 위원회의 이런 기간과 예산은 다른 사업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사업은 번역→교열→감수→공개의 네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먼저 원문을 충실하고 정확한 영어로 번역한 뒤 교열과 감수에서 어색한 용어나 잘못된 표현을 바로잡아 마무리한다. 그렇게 마련된 완성본은 해마다 인터넷으로 공개하여 누구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번역의 수준은 영어권 국가의 대학생 이상이면 한국학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는 정도로 잡고 있다. 국내외에서 이미 간행된 영역서들의 체재를 참고해 인명·서명·지명 등의 한자 표기, 각주, 색인 등을 첨부해 영어권 독자들이 흥미롭고 순조롭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학술 번역의 성패를 가르는 관건이자 가장 어려운 난관은 개념어를 합리적으로 번역해 일관되게 적용하는 것이다. 첫머리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도착어 사용자에게 낯선 제도와 인명과 지명 등 모든 상황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변환해 전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이를테면 “세종이 의정부·육조의 대신들과 공법의 시행을 논의했다”는 문장은 번역하기에 그리 어려운 구조가 아니다. 번역의 관건과 난관은 이런 단순한 구조를 이루는 단어들, 곧 ‘세종’, ‘의정부’, ‘육조’, ‘대신’, ‘공법’을 표현하는 번역어를 만드는 것이다. 실록은 이런 낯선 개념어와 그 개념어들로 서술된 낯선 상황의 바다다. 거기에는 한국인들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해외 독자라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을 유념해 이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인력은 정확하고 합리적인 번역어를 만들고 적용하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수준 높은 작업자를 위촉하는 것도 핵심적 과제다. 작업의 특성상 이 사업에는 영어·한문·한국사 모두에 일정 수준 이상의 능력을 갖춘 인력이 필요하다. 현재까지는 국내외에서 한국학을 전공한 석·박사 이상의 전문가 25명을 위촉해 번역·교열·감수를 진행했으며 앞으로도 좀더 숙련되고 수준 높은 인력을 발탁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 사업은 2017년 현재 세종 8년 3월까지 번역이 이뤄졌으며 올해 세종 11년 5월까지 번역을 완료할 예정이다. 이것은 32년에 걸친 세종의 치세에서 3분의 1을 약간 넘는 분량이다.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2016년 12월 그동안 인터넷에만 제공하던 기사를 다시 한번 손질해 책자로 간행한 것이다. The Veritable Records of King Sejong 1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간행 작업 또한 이 사업의 성과를 또다른 방식으로 보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까지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영문판 보급사업에 관련된 여러 사항을 간단히 말씀드렸다. 시작한 지 5년째 접어든 이 사업은 정확한 영문 용어의 마련과 적용, 작업 공정의 효율화, 수준 높은 전문가의 확보와 안정적 위촉 등 풀어야할 숙제가 아직도 적지 않지만 자료와 경험이 그간 충분히 축적되었고 뛰어난 역량의 전문 인력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앞으로도 세종실록 영역(英譯) 사업이 보다 정확하고 효율적인 사업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The Veritable Records of King Sejong 1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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