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만든 건..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

정원식 기자 2017. 3. 2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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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저자, 박근호 일본 시즈오카대 교수

박근호 시즈오카대 교수가 27일 경향신문과 만나 최근에 펴낸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의 내용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1960년대 초반 한국의 소득은 세계 최하위 수준이었다. 반면 인도는 아시아에서 가잘 발달된 공업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1965년을 기점으로 인도 경제는 침체된 반면 한국은 고도성장의 초입에 들어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박정희 정부가 민주주의에서는 과오를 저질렀지만 경제에서는 탁월했기 때문일까.

박근호 일본 시즈오카대 교수(54)는 지난 27일 경향신문과 만나 “박정희 정부의 정책이 그 자체로 한국의 고도성장에 기여했다고 말할 수 없다”며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빚어낸 필연적 귀결에 가깝다”고 말했다. 최근 그가 펴낸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회화나무)는 미국과 한국 자료를 통해 박정희 정부 시기의 경제성장이 ‘정책 없는 고도성장’이었음을 실증한 책이다. 그는 1988년 이후 미국국립공문서관(NARA)과 린든존슨대통령도서관이 소장한 한국 및 베트남전쟁 관련 국무부·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를 2007년 비밀 해제된 박정희 전 대통령 기록물 등 한국 측 사료와 비교 검토한 끝에 이 같은 결론을 얻어냈다. 책은 앞서 2015년 일본에서 출간됐다.

1961년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한국 경제의 발전 방향을 중화학공업으로 잡고 이듬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했다. 일부 성과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였다. 1960년대 초반 한국 경제는 1964년 존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담당특별보좌관이 대통령에게 보낸 메모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66억달러(경제원조 38억달러와 군사원조 28억달러) 이상을 한국에 투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이 나라는 여전히 불안한 의붓자식이다. 문제는 독립 후의 리더십 부재와 조잡한 경제계획 그리고 미국의 방치에 의해 생겨나고 있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부진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60년대 후반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이 시기 한국 경제는 제조업 분야에서 수출이 급증하며 경제성장의 시동을 걸었다. 집권 초반의 시행착오를 딛고 이 시기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제관료들의 정책 역량이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일까. 정책역량을 말하기 위해서는 정책 목표와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가 입증돼야 한다. 박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데이터는 인과관계를 보여주지 못한다.

“경제개발계획의 목표와 실적 간에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책방침과도 엇갈리는 경우가 허다하게 나타나는 등 경제정책과의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수출 전략상품이었던 피복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반면, 전략상품이 아니었던 내의류는 피복류의 2배에 가까운 수출실적을 달성하는 등 정부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결과가 나왔어요. 제품의 국제경쟁력이 좋았던 게 아니라 미국이 물건을 사줬기 때문입니다.”

박 교수는 “당시 거의 모든 아시아 국가가 수출촉진정책을 펴고 있었지만 한국만이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던 것은 미국의 ‘바이 코리아 정책’ 때문이었다”며 “베트남전쟁이 확대되면서 한국은 미국의 안보전략에서 반공주의의 보루라는 대단히 중요한 변수가 되었고, ‘비공산주의 국가의 쇼윈도’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의 아시아 지원은 동아시아가 아니라 남아시아, 그 중에서도 인도에 집중됐으나 베트남전 이후 반공주의 보루로서 한국의 가치를 재인식한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가 인도 경제의 침체와 한국 경제의 성장으로 이어졌다는 진단이다.

1960년대 미국은 보호주의적 통상정책을 취하고 있었으나 한국에 대해서만은 예외적으로 우대 정책을 실시했다. 박정희와 존슨은 1965년 정상회담 이후 안보적 측면에서 한국의 경제적 도약과 군사력 강화는 필수적이며 미국이 이를 위해 협력한다는 내용의 별도 각서를 체결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한국 전자산업의 발전이다. 한국은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 전자산업이 수출주력산업으로 성장한 희귀한 사례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였다. 바텔기념연구소는 한국 최초로 산업실태 조사를 수행하고 한국판 바텔연구소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을 지원했다. 연구·개발 및 혁신 시스템을 구축하고 경제정책 싱크탱크를 구축한 것도 바텔기념연구소다. 박정희 정부의 전자산업 육성책은 이 같은 기반 위에서 입안됐다.

박 교수는 “‘한강의 기적’은 미국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며 “한국의 경제성장이 특수한 상황의 결과라는 점에서 한국을 개발도상국이 본받아야 할 일반 모델로 삼을 수도 없다”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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