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나마스테!] "詩는 천천히 오고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더없이 느린 장르"
창문 너머로 신촌 기차역이 보인다. 부유하는 미세먼지 사이 석양이 부옇다. 창가의 책상이 스러지는 빛 속에 아늑하다. 책상에는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과 누군가 막 78쪽 ‘그 집 앞’을 베껴놓은 노트가 놓여 있다. 또 다른 누군가 석양녘 그 창가에서 다음 시를 이어서 베낄 것이다. 슬쩍 들춰보니 그 시는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노인들’) 흘러간다. 유희경(37) 시인이 지난해 6월 문을 연 시집 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 신촌점 풍경이다.
“한 달에 시집 한 권을 선정해서 다 같이 릴레이 필사를 해요. 이번 달은 기형도거든요. 늘 다른 형태로 이벤트를 만들려고 해요. 여기는 아직 한 달이 안돼서 어떡하면 좀 더 재밌는 걸 할 수 있을까, 계속 만져가고 있어요. 신촌 1호점이 규모가 더 크고 훨씬 세련된 느낌이라면 여긴 오붓하고 아늑한 공간이라 찾아오는 손님들과 일대일로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행사도 이런 형식에 맞춘 걸 기획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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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 2호점을 낸 유희경 시인. 그는 “시인보다 시에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면서 “시니컬한 반골기질은 예술가의 기본이요 살아내기 위해선 위트가 필요하다”고 서점 이름의 배경을 밝혔다. 서상배 선임기자 |

“예전에는 약속도 서점에서 잡고 그랬잖아요? 지금 서점은 그러기 어려운 공간이 되어버렸죠. 좀 더 매출을 올리는 데 신경을 쓰면서부터 부담스러운 공간이 된 건데 저희는 그냥 와서 놀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주변에서 모두 무모하다고 말렸지만 웬만큼 자신이 있었어요. 사실 서점보다는 문화기획 일을 좀 하고 싶었고 그 일을 하는데 공간이 필요했고, 그 공간은 책으로 채워져서 판매할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죠.”

이 공간에서 기획한 대표적인 이벤트 중 하나는 ‘낭독회’. 통상 시인들이 다음 시집을 내기까지 시간이 걸리므로 낭독을 위한 소시집을 따로 200부 정도 제작해 판매도 한다. 오늘(28일) 저녁 합정 점에서는 새로 만든 황인찬 시인의 낭독시집 ‘놀 것 다 놀고 먹을 것 다 먹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시’로 4번째 낭독회를 연다. 이곳의 낭독회가 특별한 건 아니다. 흔히 이루어지는 낭독회와 조금 차이가 있다면 ‘북토크’가 개입되지 않고 시인이 나와서 15편쯤 읽고만 들어간다는 점이다. 다섯 편 쯤 읽고 음악을 한 번 듣고 또 다섯 편 읽는 식이다. 주인장이 대표로 짧은 질문 세 개 정도 던지긴 하지만, 시인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주고받는 여타 낭독회와는 달리 쿨한 편이다. 처음에는 시인들도 시만 낭송하면 어색할 것 같다고 했지만 실제 체험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시 낭독만으로도 충분히 감흥을 느낄 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시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인 거지요. 귀로 들으면 시가 달라져요. 사실 시는 노래에서 온 거잖아요? 시인들도 처음에는 긴장하다가 자기 시를 읽기 시작하면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저도 남의 시는 못 읽는데 제 시는 잘 읽어요. 출판사들에서 기획한 낭독회를 보면서 굳이 비싼 사회자 데려다놓고 쓸데 없는 질문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시를 오롯이 들으면 훨씬 더 좋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평소에 컸습니다. 시인보다 시를 더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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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트 앤 시니컬’ 2호 합정점. |
유희경은 서울예대를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극작을 전공했고 2007년에는 희곡으로, 이듬해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가 당선돼 극작가와 시인으로 데뷔했다. 1만부를 넘긴 첫 시집 ‘오늘 아침 단어’에 이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을 냈다. 그는 “젊은 시인들이 시를 알아먹지 못하게 쓴다고 선배 세대가 통탄하기보다는 같은 길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가고 있다고 이해해 주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작금 우리 사회는 이분법의 골이 너무 깊이 패어 있는 같다”고 말했다. 그는 “시의 세계에서는 그 골이 더군다나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시는 천천히 오고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더없이 느린 장르”라고 덧붙였다.

그의 첫 시집 해설자는 유희경 시의 키워드가 ‘슬픔’이라고 썼다. 그는 “사람마다 느끼는 지점도 다르고 깊이도 다른 슬픔이라는 감정에 늘 호기심을 느낀다”면서 “내 안에 물기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청년기에 보낸 아버지가 그의 시들에 대체로 자주 눈에 띄는 편이다. ‘소년 이반’은 “아침 일찍 일어난 이반에게 부엌은 바람 없는 대나무 숲처럼 고요했다 아버지. 두고 간 얼굴을 주웠을 때 그것은 떨어뜨린 면도칼처럼 차가웠다”고 쓴다. 그는 시에서는 ‘비극’을, 희곡으로는 ‘희극’을 쓴다고 했다. 그는 “단순히 결말이 슬퍼서 비극이 아니라 슬픔을 극복하려는 노력 자체가 슬픔인 경우가 비극”이라고 했다. 그러니 “원형을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의 언저리에서 늘 실패한다”고 말하는 그의 시야말로 비극의 숙명이다. 그의 슬픔 하나는 이렇게 흐른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같은 사람이라서/ 수천 수백 수십의/ 같은 사람이 살짝/ 웃는 거라고/ 두 뺨에 손을/ 두 손을 이마에/ 번질 수 있도록/ 내어주는 거라고/ 같은 사람이라서/ 눈을 감는 거라고”(‘같은 사람’)
조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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