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정치 슬로건 경쟁]권력을 만드는 한마디
[경향신문] ㆍ막 오른 대선 슬로건 경쟁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 빨간색 야구모자에는 딱 네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 모자를 쓰고 전국을 돌며 선거운동을 한 도널드 트럼프는 전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는 저학력·저소득·교외 거주 백인 유권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은 영국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이들과도 겹친다. 주류에서 밀려난 이들은 ‘좋았던 옛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구호에 끌렸다. 고달픈 현실의 원인은 다른 인종·민족·종교 등 ‘외부’로 돌렸다. 그런 판단과 선택이 옳건 그르건, 트럼프의 선거 슬로건은 결국 유권자의 요구를 잘 읽어낸 셈이다. 덕분에 그는 유례없는 막말과 자질 논란에도 불구하고 세계 초강대국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
잘 만든 정치 슬로건은 선거판을 요동치게 만들고 권력의 지도를 새로 그린다. ‘빵·토지·평화’라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구호가 없었다면 100년 전 러시아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레닌과 볼셰비키는 계속된 전쟁과 배고픔에 진저리가 난 러시아 민중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해 세 개의 단어로 집약했다. 그것은 무능한 구 체제가 해결하지 못한 ‘민생’이기도 했다. 혁명 세력은 이 짧고 강력한 슬로건을 내놓는 것으로 사실상 임무를 다했다. 그 뒤로는 억눌렸던 민심의 노도 같은 물결에 휩쓸려 따라갔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6년 야당인 민주당이 내놓았던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경향신문이 취재한 모든 카피라이터와 선거 전략 전문가들이 ‘불멸의 히트작’으로 꼽은 역사적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은 이후 수십년간 변화를 촉구하는 야당 후보들에 의해 ‘다 죽겠다 갈아치자’ ‘이번에는 바꿉시다’ 등으로 줄기차게 변주됐다.
이처럼 절박한 시대정신을 함축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정치 슬로건이다. 역사를 바꾼 구호 안에는 당대의 욕망과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녹아 있다. 빵이나 토지, 위대함 같은 단어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가족의 얼굴이나 행복했던 순간 같은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래를 상상했을 것이다.
역대 대선 벽보를 분석한 연구를 보면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대한민국’ ‘변화’ ‘경제’ ‘서민’ ‘신뢰’ ‘젊음’ ‘깨끗함’ 등의 순이다. 최근 들어선 추상적에서 구체적으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키워드 성격이 변하는 추세다. 한 대선 캠프 관계자는 “후보가 하고 싶은 말보다 유권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미리 찾아 쌍방향 소통을 하는 게 중요하다. 공감을 위한 감성적 접근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는 5월 대선을 앞두고 각 대선주자들의 캠프도 슬로건 작업이 한창이다. 야권 후보들은 저마다 탄핵 이후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 적임자임을 알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적폐 청산과 대통합 사이의 균형 잡기가 관건이다. 보수 후보들의 슬로건 전략은 국정농단 세력과의 차별화에 방점이 찍힌다.
안병진 경희대 교수는 “슬로건이란 게 반드시 거창하거나 세련될 필요는 없다. 시대정신에 부합하고 유권자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을 쉽게 풀어내는 게 슬로건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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