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혼술족들, 수입맥주 즐겨..마트·편의점서 국산 추월

5일 서울 중구 롯데마트 서울역점 주류 코너. ‘아사히 수퍼드라이’와 ‘기린 이치반’ 캔맥주를 진열한 판매대 앞에 ‘특별상품, 많이 쌀수록 더 싸게’라는 안내글이 보였다. 캔맥주 한 개(500mL) 가격은 3700원이었지만 4개짜리 묶음 상품은 1만원에 살 수 있었다. 1개당 2750원짜리 ‘칭다오’ 맥주도 4개 가격은 1만원이었다. 바로 옆 판매대 기획 상품인 독일산 ‘L맥주’ 한 캔(500mL)은 1600원이었다. 회사원 김모(38)씨는 “수입 맥주가 고가품으로 분류되던 시대는 지났다”면서 “매주 각기 다른 수입 맥주를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그는 “전에는 맥주를 ‘소맥(소주+맥주)’ 폭탄주로 소비하는 모임이 많았는데 직장 문화가 바뀌어 회식이 줄면서 이젠 맥주 자체 맛을 음미할 환경이 조성됐다”며 “다양한 수입 맥주의 맛과 향, 목넘김 등을 기록한 ‘시음 노트’를 쓴다”고 말했다.
국내 주류 시장에서 수입 맥주 바람은 더 이상 돌풍 수준이 아니다. 국산 맥주 아성을 뒤흔들고 지각변동을 일으킬 태세다. 식당·술집을 제외한 가정용 주류 시장에선 이미 수입 맥주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올 들어 대형 마트와 편의점에서 수입 맥주 판매량이 국산 맥주를 속속 앞질렀다. 1인 가구가 늘면서 ‘혼술’(혼자 마시는 술) 문화가 확산되자 수입 맥주 강세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마트·편의점 수입 맥주 비중 50% 돌파
국내 대형 마트 1위 업체 이마트는 수입 맥주 매출 비중이 지난달 처음으로 국산 맥주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2014년 33.2%로 국산 맥주의 절반 수준이던 수입 맥주가 빠르게 전세를 역전시킨 것. 롯데마트에선 수입 맥주 비중이 47.4%로, 한두 달 안에 50%를 넘어설 전망이다.
20~30대가 즐겨 찾는 편의점에서도 수입 맥주 판매 비중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세븐일레븐 수입 맥주 비중은 2014년 23.5%에서 지난달 50.2%로 껑충 뛰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주류 시장 판도 변화는 국내 맥주 소비자들 입맛 변화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해외여행이나 각종 연수를 통해 세계 각지의 맥주 맛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효모·홉 등 맥주 원료나 발효 방식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다양한 제품을 구매하고 있다는 것. 지난해 부정청탁방지법이 본격 시행되면서 ‘폭탄주 문화’가 급속히 사라지고 퇴근 후 가볍게 한잔 즐기는 ‘라이트 음주 문화’가 확산된 것도 요인이 됐다. 일각에서는 경기 불황으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소비자들이 ‘립스틱 효과’를 노리고 수입 맥주를 찾는다는 분석도 있다. ‘립스틱 효과’란 경기 불황기 저렴한 사치품 소비가 증가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절, 경제가 어려운 데 립스틱 매출은 오르는 기현상에서 유래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 반입된 수입 맥주는 22만508t으로 전년(17만t)에 비해 29% 급증했다. 맥주 수입액은 1억8626만달러로 전년 대비 31.3% 증가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2012년 7359만달러에서 4년 만에 두 배로 증가했다.
우리나라가 맥주를 가장 많이 수입한 국가는 ‘아사히’, ‘삿포로’ 등 브랜드를 앞세운 일본이다. 중국이 ‘칭다오’ 등을 통해 2위를 차지했고, 이어 독일·아일랜드·네덜란드·벨기에·미국 순이었다.
◇“불합리한 주세, 꼼수 할인 마케팅”
수세에 몰린 오비맥주·하이트진로·롯데주류 등 국내 맥주 3사는 “국산 맥주에 대한 갖가지 규제로 경쟁력을 잃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수입 맥주는 생산원가를 파악하기 어려운 데다 현행법상 국산 맥주보다 30% 이상 낮은 주세율이 적용된다는 것. 국산 맥주는 원가에 판매관리비와 영업비, 제조사 마진 등을 포함한 출고가를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지만, 수입 맥주는 수입 원가와 관세를 합한 것을 과세 표준으로 잡아 세금이 국산 맥주의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는 것.
한 국내 맥주사 관계자는 “대형 마트들은 수입 맥주 단품 가격을 비싸게 책정해 놓고 4~5개씩 묶음으로 판매할 때 대폭 할인해 주는 것처럼 ‘꼼수 마케팅’을 펼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맥주 업계 가격 인상이 수입 맥주 판매를 더 늘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업계 1위 오비맥주는 지난해 11월부터 카스 등 주요 제품 출고 가격을 평균 6% 올렸고, 2위인 하이트진로는 평균 6.3% 인상했다. 환경부가 빈병 보증금을 인상해 어쩔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맥주 업계 관계자는 “수입 맥주병에 대한 재활용 분담금은 국내 빈병 보증금의 30% 수준에 불과해 국내 맥주 업체가 더 불리하다”고 주장했다.
◇수제 맥주도 약진… 소매점 판매 허용
최근 수제 맥주가 약진하는 것도 국내 맥주 3사들에 부담이다. 수제 맥주는 기업 자본에서 독립한 양조장에서 자체 방식으로 소량 제조하는 것. 일명 ‘크래프트(craft) 맥주’라고도 한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정부가 양조 규제를 완화하면서 소규모 양조장들이 일부 ‘맥덕’(맥주 마니아)층을 상대로 시장을 형성했지만, 최근에는 대형 유통 기업들이 속속 뛰어들고 있다. 현재 시장 규모는 500억원대로, 매년 100%가 넘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신세계그룹의 ‘데블스도어’는 최근 누적 고객 100만명을 넘어섰고, SPC그룹의 독일식 델리펍(deli pub) 매장인 ‘그릭슈바인’도 매출이 오르고 있다. 식품회사 진주햄과 패션기업 LF도 수제 맥주 사업에 나섰다. 최근에는 벤처캐피털 업체들의 수제 맥주 분야 투자도 잇따르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소규모 맥주업체가 만든 수제 맥주를 대형 할인점이나 수퍼마켓 같은 소매점에서도 판매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 또 맥주 원료 범위를 확대해 귀리나 호밀 맥주, 고구마나 메밀, 밤이 함유된 맥주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국산 맥주가 수입 맥주에 밀려 외면당하자 다양한 풍미의 맥주가 나오도록 맥주 산업 규제를 풀겠다는 것이다. 맥주 업체 관계자는 “국산 맥주는 ‘소맥(소주+맥주) 폭탄주 제조용’이라는 소비자들 지적을 알고 있다”며 “맥주 고유의 맛에 집중한 신제품을 개발해 내놓아 반전을 노리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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