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기획 - 육아휴직 실태 리포트] "퇴근 후 집으로 출근".. 직장맘은 '독박 육아' 중

이현미 입력 2017. 2. 2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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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정 양립' 여성에 초점.. '집으로 출근' 직장맘은 괴로워 / 보육정책, 되레 이중 부담만 떠안겨 / 남성 가사 참여 없인 '과로사' 우려도 / '양육·가사는 여성 몫' 사회 분위기 탓
여성 외벌이 때도 노동시간 더 많아
가사불평등 '출산율 저하' 영향 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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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덩이 아기가 뛰어다니기까지 하루하루의 변화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엄소정(40·여)씨에게 2014년 1년의 육아휴직은 자녀 양육의 기쁨을 알게 해준 시간이었다. 첫째 때는 생후 3개월 만에 동네 아주머니에게 아이를 맡긴 탓에 아이에게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알기 어려웠다. 엄씨는 “둘째를 내 손으로 직접 키우면서 첫째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를 품에 끼고 살았던 행복한 시간을 보낸 뒤 부작용도 뒤따랐다. 엄씨에 비해 가사 참여도가 적긴 했어도 맞벌이 부부로서 집안일을 함께했던 남편이 아내의 휴직기간 이후로 손을 놓은 것이다.

“휴직 때는 ‘저이도 밖에서 일하느라 힘든데 집에 있게 된 내가 해야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복직해서도 남편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아이는 더 늘었는데 남편이 도와주지 않으니 집안일은 거의 제 몫이 되면서 정말 지치더라고요.”

잠깐이지만 외벌이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졌던 남편의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또 아이와 깊은 애착을 형성하고 돌봄 능력을 키운 사람이 엄씨이다 보니 엄마를 먼저 찾는 아이를 아빠에게 맡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남편도 육아휴직이나 단축근무 등으로 아이를 돌봤다면 상황이 달랐을 거예요. 여자도 육아휴직을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제도의 대상을 여성에게만 집중하는 건 일하는 엄마의 부담을 늘리는 것 같아요. 남자든 여자든 집안일에 익숙해진 사람이 계속 더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육아휴직을 했던 여성들의 부담이 더 커질 수밖에 없잖아요.”

◆직장맘 “퇴근 후 집으로 출근”

엄씨 같은 ‘직장맘’이 부지기수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자녀 양육과 가사를 여성의 몫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맞벌이를 하더라도 남성보다 많은 가사 부담을 떠안게 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기준 맞벌이 남성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41분, 맞벌이 여성은 3시간13분으로 일하는 아내의 가사노동 시간이 2시간32분이나 길었다. 미혼일 때는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40분, 여성이 1시간54분이던 게 결혼한 뒤에는 남성이 50분, 여성이 4시간19분으로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여성 외벌이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남편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 가장의 가사노동 시간(2시간39분)이 남편(1시간39분)보다 1시간 많았다. 반대로 외벌이 남성 가장의 가사노동 시간은 46분, 아내는 6시간으로 이 경우 집안일에 대한 성별 분업이 뚜렷했다.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은 남녀의 취업 유무와 무관하게 여성에게 쏠렸다.

여성 위주의 일·가정 양립제도가 여성의 부담을 줄여주기는커녕 오히려 일·가정 양립을 어렵게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회사에서 퇴근해 집으로 출근하는’ 여성의 이중부담을 줄이고, 야근·특근 등 장시간 근무에 허덕이는 남성의 고단함을 덜어주기 위해 남성의 일·가정 양립제도 참여가 절실한 상황이다.

지난해 육아휴직자 수는 8만9795명으로 이 중 남성의 비율은 8.5%(7616명)에 그쳤다. 2003년 1.5%와 비교해 많이 올랐으나 여전히 육아휴직자 10명 중 1명에도 못 미친다.

출산휴가, 육아휴직,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등 일·가정 양립제도가 여성 위주로 추진된 건 우리 사회가 여전히 자녀 양육을 여성의 영역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출산휴가는 근로기준법에, 육아휴직과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은 남녀고용평등법에 법적 기반이 마련돼 있지만 정부에서는 이러한 제도를 통칭해 ‘모성보호제도’라고 부른다. ‘육아 아빠’를 꿈꾸는 남성이 늘었어도 ‘부성보호’라는 말은 전혀 쓰이지 않는다.

◆남성 참여 유도하는 일·가정 양립제 절실

또 일·가정 양립제도가 부모가 된 남녀의 권리 향상이 아닌 저출산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되면서 여성에 초점이 맞춰졌다. 출산의 장애 요소인 양육 부담을 완화하고 여성의 경력단절을 줄여 출산율을 높이는 방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국회입법조사처 조주은 조사관은 “일·가정 양립 지원 정책이 성 중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육아에 대한 1차적 책임을 여성에게 지우고 있다”며 “남성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적극적인 제도 개선 없이는 일하는 여성에게 가사노동의 이중부담을 떠안기는 ‘과로사 정책’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존의 조사를 보면 남녀의 가사불평등이 심화될 경우 삶의 질은커녕 출산율 제고마저도 어려워진다. 여성정책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2016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무자녀 또는 1자녀 출산을 원하는 이유로 미혼여성은 ‘가사·양육 불평등, 출산에 따른 불이익’(27.1%)을 1위로 꼽았다.

한국노동연구원 장지연 박사는 “육아휴직제도를 여성들만 이용하고 남성들은 못 쓰는 상황이 심각한 문제”라며 “이로 인해 여성의 직장 이탈 비율이 높아지거나 여성에게 과도한 가사노동이 가중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서울대 금현섭 행정대학원 교수는 “근로시간 단축과 유연근무제 등이 여성만을 대상으로 추진되면 고용시장에서 남녀차별 요소로 작용할 수 있고 여성의 경력단절도 심화할 수 있다”며 “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근로자를 대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획취재팀=윤지로·김준영·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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