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3호분을 해부한다(1) - 황해도 안악3호분의 주인은?
[고구려사 명장면-12] 1949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3기의 고구려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3호분이 눈길을 끌었다. 무덤의 규모가 크고 벽화의 보존 상태도 좋았을 뿐 아니라 무덤 안에는 250여 명의 인물로 이루어진 대행렬도 등 다양한 벽화가 벽면 가득 담겨 있었다. 실로 고구려 생활사 자료의 보고였다. 여기에 더하여 7행 68자로 된 동수(冬壽)라는 인물의 묘지 묵서명(墨書銘)은 안악3호분을 해방 이후 북한 최고의 발굴로 자리매김하게 한 최고의 명문 자료였다. 그리고 그 묵서명이 후일 국제적 논쟁거리가 되리라곤 발굴 당시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 묘지 묵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화(永和) 13년 초하룻날이 무자일(戊子日)인 10월 26일 계축(癸丑)에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이자 낙랑상(樂浪相)이며, 창려·현도·대방태수(昌黎玄兎帶方太守)요 도향후(都鄕侯)인 유주(幽州) 요동(遼東) 평곽현(平郭縣) 도향(都鄕) 경상리(敬上里) 출신 동수(冬壽)는 자(字)가 □安인데, 나이 69세로 벼슬하다 죽었다."
영화(永和)는 동진(東晋)의 연호로서, 12년으로 끝나고 승평(升平) 연호로 바뀌었는데, 묘지명에서는 이전 연호를 그대로 쓰고 있으니, 아마도 연호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영화 13년은 서기 357년으로 고구려 고국원왕 재위 27년이다.
묘지라고는 무덤 안에 오직 동수의 것만이 적혀 있기 때문에 당연히 무덤의 주인공도 동수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1950년대에 북한학계에서는 안악3호분=동수묘설을 비판하면서 고국원왕릉설이나 미천왕릉설을 제기하였다. 고구려 벽화고분 중 무덤의 규모가 가장 크고, 또 대행렬도의 규모가 왕의 행렬급에 해당하며, '성상번(聖上幡)'이라는 글자가 쓰인 깃발이 보이고, 벽화 주인공의 복장이 왕의 복색에 해당한다는 점을 들어 안악3호분은 왕릉이라고 주장하였다. 묘지가 쓰여져 있는 동수는 묵서 아래 인물인 장하독이라는 것이다. 다만 미천왕릉이냐 아니면 고국원왕릉이냐인데, 1990년대 이후 북한학계에서는 고국원왕릉설이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북한측의 주장은 여러 면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우선 안악3호분은 4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이러한 돌방무덤과 고분벽화라는 양식은 당시까지 고구려 사회에서는 낯설은 장의 양식이다. 수도 국내성에서는 5세기 초까지 여전히 돌무지무덤이라는 고구려 고유의 묘제가 성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천왕릉이든 고국원왕릉이든 갑자기 왕릉을 왜 벽화가 그려진 돌방무덤으로 만들게 되었을까? 그리고 뒤이어 국내성에서 소수림왕릉이나 고국양왕릉, 광개토왕릉은 다시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은 앞뒤가 잘 안 맞는 논리이다.
더구나 안악3호분이 위치한 곳은 당시 북상하는 백제와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예성강 전선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이 아닌가? 이런 곳에 무엇보다 안녕을 중시하는 왕릉을 안치했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할 정도로 전선이 불안정한데, 평양보다 더 남쪽인 안악 지역에 아버지 고국원왕릉을 모신다는 생각을 과연 아들 소수림왕이 하였을까? 그리고 고국원왕이 평양 경영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해도 아직 낙랑, 대방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는 그리 안정되지 않았던 그런 시기이다.
이처럼 정황상으로도 그렇지만, 무덤 안 벽화의 내용이나 양식을 보아도 고구려 왕릉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무덤 주인공을 포함해서 등장 인물들의 복식도 국내성 일대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 고유의 것과는 거리가 있다. 무덤 주인공의 부인과 시녀들의 풍만한 얼굴은 한~위·진대 중국 여인의 모습이지, 갸름한 고구려 여인의 모습과는 다르다. 아마도 벽화 제작을 담당한 이들이 고구려인이 아니라 낙랑계 혹은 북중국에서 흘러든 한인 화가일 것이다.
안악3호분에는 무덤 주인공을 시위하고 있는 인물로 성사(省事)·소사(小史)·문하배(門下拜)·기실(記室)·장하독(帳下督)이란 관직명도 기록되어 있다. 이들 속관도 왕릉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논란거리이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군태수급에서 3품장군 이하급 관리의 속관으로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에 무덤 주인공이 동수여도 그다지 모순된 점이 없다.
그리고 벽화에 보이는 묘주의 관모 등 복색도 묵서명에 보이는 동수 관직의 위계와 잘 대응하고 있기 때문에 무덤 주인공은 동수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오히려 벽화에 보이는 등장 인물들의 복식 등에서 왕릉급이라는 단서를 찾기가 더 어렵다. 물론 무덤의 규모가 고구려 벽화고분 증 가장 크지만, 이 정도 크기로 고구려 왕릉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고구려 왕릉의 위상을 축소시키는 결과가 될 수도 있겠다.
필자도 2005년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한 남북학술조사팀에 참여하여 북한의 고구려 벽화고분 여럿을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안악3호분도 조사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필자는 이미 안악3호분의 동수묘지명을 검토한 적이 있고, 그래서 고구려 왕릉설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이를 알고 있던 북한학자들은 내게 "가서 직접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필자도 내심 내 생각이 틀리기를 바라는 기대감도 가졌다. 하지만 직접 무덤을 본 뒤 고구려 왕릉으로 보기에는 축조 방식 등 많은 점에서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의 결론은 안악3호분은 동수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필자의 확신에 북한학자들은 실망한 듯한 눈치였다.
북한학계가 왕릉설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마도 안악3호분처럼 당대에 가장 뛰어난 벽화고분을 고구려의 문화유산으로 만들어야 할 당위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런 대형 벽화고분이 고구려의 숙적이었던 전연 출신 망명객의 무덤이라면 더욱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고, 게다가 이런 규모의 고분을 망명객이 만든다면 4세기 중엽까지도 안악 일대는 고구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일지도 모른다는 조바심도 들었을 것이다. 선입견이 올바른 역사 해석을 가로 막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하지만 안악3호분이 동수무덤일 경우 우리는 이 고분을 통해 고구려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더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왕릉이든 동수무덤이든 안악3호분이 고구려의 문화유산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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