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사회, '시발비용'을 아십니까
[경향신문]

입사 6개월차 신입사원 박용석씨(가명·26)는 취업 후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바로 장보기다. 박씨는 “퇴근 후 집에 가기 전 근처 대형마트에 들러 무엇이든 꼭 사야 마음이 놓인다”며 “맥주나 치킨 등 먹을거리를 사기도 하고 청소도구나 방향제와 같은 잡다한 물건을 사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지불하는 돈이 일주일에 30만원 정도. 이는 월 300만원을 버는 박씨에게 적지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그는 이 돈이 아깝지 않다고 한다. 박씨는 “하루종일 지시받고 시키는 일만 하던 내가 그나마 물건을 고르고 살 때는 사람 같이 느껴진다”며 “스트레스가 많은 날은 마트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다”고 말했다.
학원강사 김다희씨(36)도 부쩍 소소한 소비가 늘었다. 김씨의 가방 안에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백화점에 들러 사모은 4만원대 립스틱이 10개가 넘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심한 날이면 어김없이 백화점을 찾는다. 김씨는 “아주 비싼 건 살 엄두도 못 내고 기분전환을 위해 3~4만원대 립스틱이나 화장품을 주로 산다”고 했다. 박씨와 김씨 모두 자신들의 이러한 지출을 ‘시발비용’이라 불렀다.
시발비용은 비속어 ‘X발’과 ‘비용’을 합친 단어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비용’을 뜻한다. 이 신조어는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큰 공감을 얻으며 누리꾼들 사이에 통용되고 있다.
누리꾼들이 예로 든 시발비용에는 ‘스트레스를 받고 홧김에 시킨 치킨 값’과 ‘평소라면 대중교통을 이용했을텐데 짜증나서 탄 택시비’ 등이 있다. 취업준비생 안모씨(29)는 “계속된 취업 실패로 매일 술을 마시는 등 시발비용 지출이 늘고 살이 쪘다”며 “이렇게 찐 살 때문에 헬스장을 등록해 또 다시 시발비용을 지출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누리꾼들은 “스트레스로 시발비용이 지출되다 보면 탕진잼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시발비용보다 앞서 등장한 유행어 ‘탕진잼’은 “소소하게 탕진하는 재미가 있다”는 말을 줄인 것으로, 저가의 생활용품과 화장품을 여러개 구입하는 등 자신의 경제적 한도 내에서 마음껏 낭비한다는 의미다. 큰 금액이 아니지만 자신에겐 소소한 금액의 소비도 ‘탕진’이라는 자조적 의미도 포함한다.
이런 유행어 탄생의 원인으로는 경제불황과 어수선한 시국이 꼽힌다. 경희대 이택광 교수(글로벌커뮤니케이션)는 “지속된 경기불황과 불안정한 시국으로 개인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면서 소소한 소비 문화 확산으로 이어진 것 같다”면서 “과거엔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풀었다면 이제는 타인을 만나는 데 발생하는 비용도 부담스러워지면서 개인적 소비로 이를 대체하게 된 것”이라 분석했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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