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김현수가 질색하는 땅의 정령, 그리고 발사 각도(Launch Angle)

휴일 오전 인천 공항 3층 출국장. 한 켠이 소란스럽다. 기자들이 몰리고, 카메라 불빛이 어지럽다. 아이돌인가? 잠시 후, 주인공이 나타났다. 유명 브랜드 로고들이 가득한 배너를 배경으로 자리잡는다.

짙은색 캐주얼 차림이다. 목걸이까지 한껏(?) 패션 감각을 뽐냈다. 그런데 참 묘하다. 주인공의 표정이 썩 밝지 않다. 잔뜩 펼쳐진 TV 마이크 앞에서 뭔가 찜찜한 표정이다. 웃음 중간중간에 얼핏 가볍지 않은 감정들이 비친다. 사진 기자들이 포즈를 요청한다. 오른손을 들고 살짝 미소. 하지만 영 어색하다.

WBC에 대한 미안함 탓이었다. 합류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으리라. “나가고 싶었는데…. 김인식 감독님께 죄송하다.”

여론도 그의 편이다. ‘그동안 기여한 게 얼마냐’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게다가 처지에 대한 공감대도 상당하다. 공항에서도 그런 해명이 있었다. “나는 아직 주전이 아니다. 미국에 가면 다시 엄청난 경쟁이 펼쳐질 것이다. 팀에 믿음을 줘야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의 입지는 안정적이지 못하다. 여전히 플래툰에 묶여 있다. 소속팀은 지속적으로 외야 보강을 위해 노심초사 하고 있다.

이상하다. 시즌을 예상하는 각종 지표는 나쁘지 않다. 대표적인 통계 전문 사이트인 fangraphs.com은 팀내 최고 타율(.294)과 출루율(.370)을 기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걸 바탕으로 한 현지 미디어들의 보도도 호의적이다. ‘개막 엔트리는 당연하고, 리드오프는 Kim에게 맡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얼핏 납득이 안 가는 대목이다. 1~2개 중요한 공격 지표에서 팀내 최고가 예상되는데, 여전히 입지가 불안정하다니…. 이건 모순이다.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2가지 명제가 서로 충돌한다.

혼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오늘 <…구라다>가 하려는 얘기다. 

억울함에 격앙된 김현수 

그의 입장에서는 이런 현상이 억울할 지 모른다. 평가절하됐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런 장면이 있었다. 작년 12월에 방영됐던 TV 프로그램이었다. MBC 스포츠특선 <코리안 메이저리거 특집 - 우리들이 기억하는 그날> 편이었다. 그를 비롯해 오승환, 이대호, 박병호 등이 지난 시즌의 중요한 순간들을 회고하는 내용이었다.

녹화가 거의 끝날 때 쯤이었다. 챕터 중의 하나로 ‘위기의 그날’이라는 순서였다. 커다란 자막이 등장했다. ‘땅의 정령’이라는 네 글자와 함께 몇 개의 플레이 화면이 이어졌다. 그가 땅볼을 치는 장면들이었다. 그걸 보며 좌중이 한마디씩 거든다.

이대호 : (감탄하며) 와 땅볼이다. 근데 다 안타다.

오승환 : 야, 안 뜬다. 안 떠.

(이 대목에서 그가 격앙됐다.)

김현수 : 아, 근데. 이거는 진짜 말하고 싶은게. (억울, 억울) 땅볼 나보다 많이 친 선수 많거든요. 보스턴 레드삭스 젠더 보가츠 같은 선수….

오승환 : 그건 너만 아는 거야. 한국 야구팬들이 누가 알아 그거를.

김현수 : 제가 말하고 싶은 거는, (반복해서) 제가 말하고 싶은 거는. 이런 거는 방송국에서 만든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이대호 : 맞다. 잘한다.

김현수 : 한국에 있을 때는 ‘내일 나가면 뭐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내일은 좌투수인지, 우투수인지 그걸 먼저 한번 생각하게 되고, 게임을 나가서는 공을 또 멀리 칠수 있을까 없을까, 고민하게 되고, 한 타석을 칠수 있을까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저런 거를 방송에서 만들면 선수가 뛰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저건 놀리는 거 밖에 안되잖아요.

(감정이 격해서 말을 이어간다)

김현수 : 제가 땅의 정령이 된 게 아니잖아요. 저렇게 쳐도 안타다. 미국에서도 인정을 해줬는데, 한국에서는 저를 땅의 정령으로 만들어놨어요.

(급기야 옆에 있던 선배들이 다독인다.)

오승환 : 현수야 흥분하지 마.

이대호 : (당황하는 제작진들 보며) 흥분시키지 좀 마요.

오승환 : 땅볼 안치면 되잖아. 첫번째 원초적으로 니 잘못이야. 왜 남 탓을 해.

이대호 : 나도 땅볼 많이 쳤는데 아무 말 안하잖아요. 현수가 만만해 보여요? 그러지 말아요. ㅎㅎㅎㅎ

김현수 : (진정 모드로 돌아와) 너무 심한 거 같아요.

오승환 : 너무 신경을 쓰지마. 너 때문에 더 알게 된거야. 자꾸 얘기해가지구….

김현수 : 아, 내년에는 땅볼 안치겠습니다. ㅠㅠ

 ML 평균보다 훨씬 강했던 김현수의 타구

 이 대목에서 두 가지 감상이 교차한다. 미안함과 의아함이다. 왜? <…구라다>도 예전 글에서 비슷한 표현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땅볼 요정’이라고. 어디 <…구라다> 뿐이겠는가. 많은 댓글러들도 그런 식으로 그의 신묘한 안타를 묘사하곤 했다. 어쨌든 상처가 됐다면 그에게나, 그의 팬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다만, 변명을 하자면 ‘방송국’이나 <…구라다> 등등이 비아냥의 의도를 가졌을 리 없다는 사실이다. 조금 더 흥미로운 서술을 위해 동원된 수사(修辭) 정도로 봐주시라. (그래도 당사자가 언짢다면 이제는 삼가야겠지만.)

의아함의 이유도 그래서 생긴다. 말했다시피 땅의 정령이라는 표현이 그렇게 불편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는 확연한 정서의 차이가 느껴진다. 밖에서 보는 사람과, 실제 경기장 안에서 뛰는 당사자의 입장 차이 말이다. 좋은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감정, 정서, 느낌 따위로 얼버무리지 말자. 과학적으로 접근해보자.

그의 땅볼 안타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땅볼이지만 ‘더 잘 맞은 타구’라는 뜻이다. 무슨 말이냐. 다른 선수들 것은 수비에 걸리는 데, 반대로 그가 친 것은 빠져나간다는 뜻이다. 왜? 더 강하게 구르기 때문이다.

근거가 있다. 스탯캐스트(StatCast)다. 몇 년전부터 메이저리그에 도입된 개념이다. 그라운드 안에서 일어난 선수와 공의 모든 움직임을 데이터화한 정보다. 속도, 방향, 거리 등이 구체적인 수치로 표현된다.

여기에 따르면 그가 2016년에 친 타구의 평균 출구 속도(Exit Velocityㆍ맞는 순간의 스피드)는 92.22마일이었다. 이는 ML 전체 평균 89.57마일보다 훨씬 빠른 스피드다. 그만큼 강하게 맞아 나갔다는 얘기다. 

                 평균 출구 속도

김현수     92.22마일 (148.41㎞)

ML전체    89.57마일 (144.14㎞)

김현수의 코스별 출구 속도. (포수 관점)  StatCast

강하다는 것은 빠르다는 의미와 통한다. 그만큼 수비의 틈을 빠져나갈 확률이 높아지는 셈이다. 그의 타석에서 펼쳐졌던 상대의 수비 시프트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땅볼의 본질적인 한계  

그를 아끼는 팬들은 편견을 주장하기도 한다. 쇼월터 감독이나 구단 프런트가 공평하지 못한 잣대를 가졌다는 비판이다. 그래서 팀내 최고 타율과 출루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입지가 불안하다는 불만이다.

뭐, 감정적으로야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근거는 충분치 않다.

그보다는 땅볼이 가진 본질적인 한계를 수긍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이렇다. 아무리 잘 맞아도, 땅볼은 땅볼이다. 즉, 장타에 대한 기대치가 떨어진다는 문제다. 이는 곧 상대에 대한 위압감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물론 전성기의 이치로급 정도라면 몰라도.)

속된 말로 똑딱이라고 부른다. 짧은 안타만 치는 타자를 낮춰 보는 말이다. 그가 스튜디오 녹화장에서 벌컥했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KBO 시절만해도 그는 중거리 타자로 분류됐다. 심심치않게 2루타 이상을 기록했다. 잠실이라서 그렇지 거리도 꽤 나갔다. 반면 ML 루키 시즌에는 현저히 장타가 줄어들었다. 

                 2015년과 2016년 비교  

타율          .326 →.302   (-7.3%)

장타율      .541 →.420   (-22.4%)

타율은 3할대를 지키며 그럭저럭 유지했다. 감소 수준이 10% 미만이었다. 하지만 장타율은 급격히 떨어졌다. 무려 22.4%, 타율이 줄어든 것의 3배가 넘는 수치였다.

원인이야 모두가 짐작하시는 바 아닌가. 아무래도 위축된 시즌을 치르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

다시 한번 StatCast의 신세를 진다. 비행 각도에 따라 타구는 아래와 같이 분류된다.

발사 각도(Launch Angle)라는 용어로 표시한다.   

땅볼           : 10° 이하

라인드라이브 : 10°~25°

플라이볼         : 25°~50°

팝 플라이    : 50° 이상

이상적인 것은 라인 드라이브다. 가장 멀리 날아가는 발사 각도다.

그럼 지난해 그의 타구는 어땠을까. 

김현수   : 8.55°

ML평균  : 9.97° 

애초에 각도 자체가 낮다. 평균을 훨씬 밑돈다. 땅볼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해결책은 이미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나왔다. 상기하시라. 오승환이 농담 속에도 냉정하게 했던 말. “땅볼 안치면 되잖아. 첫번째 원초적으로 니 잘못이야. 왜 남 탓을 해.”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타격 매커니즘 전체를 손봐야 할 문제일 지 모른다. 그로 인해 커다란 슬럼프가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극복해야 할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야 더 이상 ‘정령’이니 ‘요정‘이니 하는 말 들을 필요없다. 그래야 진짜 김현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