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군주, 고국원왕
[고구려사 명장면-11] 고구려사를 읽다 보면 좀 비장하게 느껴지는 왕이 있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이다. 흔히 고구려 하면 활발한 정복 활동이나 치열한 전쟁의 장엄한 승리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이런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시련을 겪었던 인물이 고국원왕이기 때문이다.
342년 10월, 전연 왕 모용황은 용성(龍城:지금 중국 요녕성 조양)으로 천도한 후 중원 땅을 도모할 뜻을 품었다. 이때 전연의 전략가인 모용한(慕容翰)이 제안하였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다음 우문씨를 멸망시킨 뒤에 중원을 차지함이 마땅합니다." 이어 고구려를 공격할 비책까지 내놓았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도(北道)는 평탄하고 넓으며, 남도(南道)는 좁고 험하므로, 아마도 고구려는 북도를 막고 남도를 소홀히 할 터이니, 정예군을 이끌고 남도로 진격하면 국내성도 취할 수 있습니다."
11월에 전연군이 침공한다는 첩보를 듣자 고국원왕은 아우 고무(高武)가 5만군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소수 군사만을 데리고 남도를 지켰다. 왜냐 하면 북도가 요동에서 고구려로 들어오는 전통적인 교통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연 모용황과 모용한이 4만군을 이끌고 남도로 공격해왔고, 예상치 못한 기습에 패배한 고국원왕은 수도 국내성을 적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전연군도 비록 국내성을 함락시켰지만, 북도로 진격한 1만5000 군사가 궤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퇴각을 서둘렀다. 북도를 지키던 5만의 고구려군이 남도의 퇴로를 끊는 날에는 전군이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구려 주력 군이 건재한 상황에서 전연으로 돌아간 뒤에도 고구려의 공세가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미천왕의 시신을 강탈하고, 왕모와 왕비 등 5만명을 인질과 포로로 데리고 갔다. 이 전략은 주효했고, 인질을 잡힌 고구려는 전연과 충돌하기보다는 화평의 길을 선택하였다. 후환을 던 전연은 346년에 우문씨와 부여를 차례로 제압하고 세력을 키워 중원으로 진출해갔다.
사실 전연과의 전투에서 수도가 함락된 것보다는 5만명 주민이 전연에 끌려갔다는 점이 고구려로서는 더욱 큰 타격이었다. 왜냐하면 이 5만여 명 중에는 국내성을 중심으로 그 일대에 거주하던 귀족 등 국가 운영 세력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국원왕으로서는 수도의 복구는 물론 국가 운영을 위한 인적 자원도 시급히 보강해야 했다. 그래서 고국원왕은 평양에 주목했다.
평양은 고조선 이래 정치적 중심지이며 낙랑군 등을 통해 선진 문물이 공급되던 문화적 거점이기도 하다. 오랜 역사적 전통이 켜켜이 쌓여 있으며 다양한 문화가 어우려져 있고, 중국 문화에 익숙한 인적 자원이 풍부한 곳이기도 하다. 343년 고국천왕은 평양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겨 아버지 미천왕이 확보한 낙랑·대방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경영에 나섰다. 차회에 살펴볼 안악3호분의 피장자 동수(冬壽) 같은 인물이 그런 평양 지역 경영의 조력자였다. 고국천왕은 충격적인 패배를 딛고 곧바로 국난을 수습할 방향을 올바르게 설정한 셈이다. 따지고 보면 후일 평양 천도의 기반은 고국원왕 때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평양 일대에서 세력 기반을 충실히 하기를 20여 년. 고구려는 착실히 국력을 회복했지만 요동 등 서쪽 정세를 보면 새로 전진(前秦)이 성장하면서 370년 전연을 멸망시키는 상황인지라 서방으로의 진출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고국원왕은 눈을 남쪽으로 돌렸고, 당시 기세 좋게 성장하고 있던 백제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369년 첫 공세는 고국원왕이 먼저 취했지만 371년 10월에 반격에 나선 백제 근초고왕이 이끄는 3만 군대와 평양성에서 맞서 싸우다가 그만 흐르는 화살에 맞아 고국원왕 자신이 전사하고 말았다. 전쟁터에서 왕의 전사. 그것은 고구려 왕실로서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원한이 되었다.
이렇게 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패배를 두 차례나 당하였으니 무능한 왕으로 치부될 만도 한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전연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모용한은 전연 최고의 전략가였으며, 당시 전연군은 욱일승천하는 기세를 타고 있었다. 또 평양성 전투에서도 상대가 백제 최고의 정복군주 근초고왕이었으니 역시 적수를 잘못 만난 셈이었다. 고국원왕은 무능했다기보다는 불운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고국원왕은 나름대로 고구려 왕권을 안정시킨 인물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상으로는 '태왕(太王)'으로 불리는 첫 번째 왕이었다. 왕 중의 왕이란 뜻의 '태왕'이란 칭호를 받았다는 것은 고국원왕이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신망을 받고, 왕의 권위를 높이 드러냈던 왕이었음을 시사한다. 비록 뼈아픈 패배를 두 차례나 당하기는 했지만 고국원왕은 전쟁 때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앞장서는 군주였다. 화살에 스러진 그의 죽음도 사실 전쟁터 최전방에서 지휘했기 때문이리라. 이런 것을 보면 전쟁의 승패가 아니라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느냐가 통치자의 덕목으로서는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게다가 오랜 기간 평양 일대를 경영하면서 고구려를 새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인적 기반을 확보한 점은 눈에 보이지 않은 고국원왕의 업적이었다. 그의 아들 소수림왕에 의해 이뤄진 율령 반포, 불교 공인, 태학 설립 등으로 대표되는 체제 개혁도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 힘을 비축한 그의 손자 광개토왕은 무력으로 전연의 선비족과 백제에 당한 과거의 수모를 그대로 되갚았다.
그런 점에서 고국원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 광개토왕이다. 고국원왕의 또 다른 시호는 국강상왕(國罡上王)이다. '고국원'이나 '국강상'이란 말은 같은 뜻으로 왕릉이 위치한 장지명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광개토왕의 공식 칭호에도 '국강상'이란 이름이 들어있으니, 고국원왕과 같은 곳에 왕릉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장지가 동일한 왕은 이 두 왕뿐이다. 혹시 이는 광개토왕의 뜻이 아니었을까? 비운의 주인공,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한을 풀었고, 그래도 모자라 그를 위로하는 마음에 그 옆에 자신의 왕릉 자리까지 잡은 것은 아닐까?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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