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내 이름 오른 블랙리스트?.. 상관없어, 연극만 잘하면 그만"

장재선 기자 입력 2017. 1. 1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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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웅 산울림 대표가 서울 홍대거리에 있는 산울림소극장 무대에서 포즈를 취했다. 연극 인생 60년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그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살아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하는 연극의 생명력은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임영웅 연출가는 사진 기자의 다양한 포즈 요구에 익숙하게 응하며 “내가 배우들에게 지시하는 자세여서 낯설지 않다”고 했다. 산울림 소극장 카페 앞. 신창섭 기자 bluesky@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

평생 연극무대를 꾸며 온 연출가답게 그의 패션 감각은 뛰어났다. 잔잔한 카키색 체크무늬 슈트를 차려입고, 안에는 회색 줄무늬 셔츠와 감색 니트 조끼를 갖췄다. 목에는 줄 달린 돋보기안경을 둘렀고 재킷 왼쪽 가슴주머니엔 선글라스를 끼워 뒀다. 그는 서 있을 땐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몸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젊은것들이 덤비면 휘두르려고…”라며 익살스럽게 설명했다. 카리스마와 유머를 겸비한 것으로 유명한 연출가다웠다. 인터뷰 도중에 “차를 마시라”고 연신 권하는 데서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는 1936년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2년 앞선 34년생이라고 했다. 올해 83세인 그는 서울 휘문중 3학년 때 6·25전쟁을 만났다. 수없이 사람이 죽어 나가던 전쟁의 한가운데서 그는 서울극장(현재의 충무로에 위치)으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북한과 옛 소련 영화를 극장에서 틀어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거리를 활보하던 어느 날 인민군에게 붙들려 일신국민학교(현재 충무로 3가 극동빌딩 자리) 운동장으로 끌려갔다. 거기엔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청장년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당하는 자리라는 걸 알고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 공산당 학생동맹 간부로 보이는 한 사람이 갑자기 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야, 인마! 왜 너 거기 있어? 이리 나와!” 그를 학교 건물 뒤편으로 데려간 청년이 후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영웅아, 밖으로 나돌지 말고 집에 숨어 있어.” 청년은 학교 연극반 선배로, 연극 ‘마의태자’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이였다. 두 달 뒤 서울은 국군에 의해 수복됐다. 그를 도망치게 한 청년은 수복 때 미군의 비행기 폭격에 세상을 떠났다.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그렇게 살아난 그가 최근 연극인생 60년 공로를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예술인에게 주는 최고등급의 훈장으로, 생존해 있는 사람에게 수여된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 3일 서울 홍대거리에 있는 산울림 소극장에서 만난 그는 “훈장 받기 전날 잠을 못 이뤘다”고 했다. 연극을 하며 숱한 상을 받았으나 국가가 주는 금관훈장은 감회가 컸기 때문이었다. “내가 과연 훈장을 받을 만한 일을 했는지 스스로 물었습니다. 내 연극 활동이 국가에 조금은 긍정적으로 기여했을 수도 있지만, 연극을 하면서 한 번도 국가를 위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오로지 자신이 좋아서 연극을 했다고 하지만, 그는 해외 공연을 통해 한국 연극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는 원작자 사무엘 베케트의 고향인 아일랜드 더블린에 두 번(1990년, 2008년)이나 초청됐다. 현지 언론들이 “한국에서 온 연극인들이 ‘고도’의 진수를 보여줬다”는 등의 호평을 쏟아냈다.

1955년 연극 ‘사육신’을 연출하며 데뷔한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연극계의 대부다. 고전에서부터 현대극까지, 국내 창작극에서 해외 문제작까지 아우르되 ‘좋은 무대’만을 고집했다. 상업주의와 타협하지 않은 정통 연극을 지켜왔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면서도 ‘위기의 여자’‘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등을 통해 중년여성 관객 붐을 일으킨 명장이다. 1966년 국내 창작 뮤지컬 1호인 ‘살짜기 옵서예’ 연출을 맡았던 기록도 갖고 있다. 그는 1970년 산울림극단을 창단하고 그로부터 15년 후 산울림 전용 소극장을 개관해 지금까지 꾸준히 작품을 올렸다.

극장 건물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기 전에 극장 계단 등에서 사진 촬영을 했다. 극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 벽에는 산울림을 거쳐 간 배우들의 얼굴 사진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백성희, 김무생 등 작고한 배우들과 여전히 무대에서 활동하는 원로·중견들의 얼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신구, 오현경, 김용림, 사미자, 전무송, 최선자, 박정자, 반효정, 김성옥, 손숙, 윤소정, 윤여정, 정동환, 이호성, 윤석화, 안석환, 한명구, 배종옥….

이런 배우들과 평생 함께하며 어느덧 노경에 이른 그는 말이 느린 편이고, 방금 했던 이야기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시끄러운 카페에서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청력과 기력이 좋았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신데, 배우 박정자·손숙 씨도 연극 부문 회원이더군요. 두 배우와 함께 작업을 하셨는데, 누가 더 편했습니까.

“박정자는 영화를 한 고 박상호 감독의 여동생인데, 동아방송 개국 1기 성우였어요. 내가 거기 PD를 했으니 그때부터 알고 지냈지. 내가 교육도 시켰으니 쉽게 말하면 내 제자예요. 손숙은 산울림 창단 멤버였어요. 나와 함께 작업한 배우들은 모두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들이에요.”

비교를 강요하는 질문에 그는 내공 깊은 답으로 응했다. 그는 배우들에게 엄격하면서도 사랑이 넘치는 연출가로 유명하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 궁핍했던 연극 연습 현장에서 먹을 것이 생기면 자신은 먹지 않고 배우들을 챙겨줬던 이였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산울림을 거쳐 갔는데, 특별히 기억 남는 배우는.

“39세에 세상을 떠난 함현진이라는 배우가 있었습니다. 내가 만난 이들이 다들 좋은 배우지만, 그 중에도 함현진은 아주 감성이 풍부하고 열정이 남다른 사람이었지요. 산울림 창단 멤버로,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했어요. 그 친구 평소 소원이 파리에 가는 것이었지요. 당시엔 해외에 가는 게 어려웠잖아요. 파리를 가려고 태국을 거쳐 이란에 갔다가 거기서 죽고 말았어요. 자살이니, 타살이니, 말이 많았는데 정확한 사인은 아무도 몰랐지요. 재주 많은 사람이 일찍 죽는다더니….”

―대본을 세밀하게 쪼개 연기 지도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무대 위 배우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작품을 이해하는 겁니다. 보통 대본을 받으면 전체를 한번 읽어본 후 자기 것만 연습하지요. 대사를 그저 달달 외우지요. 그런데, 난 연습할 때 대본 리딩 기간을 매우 길게 잡습니다. 작품 이해 시간을 갖는 거지요. 대개 일주일 동안 읽고, 그다음에 블로킹(동선제한)에 들어갑니다. 내가 추구하는 건 러시아 스타니슬랍스키(1863~1938)식의 사실주의 연극입니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으니 스타니슬랍스키식 시스템을 기본으로, 현대적으로 발전시켜서 하는 것이지요.”

―평소 연극 혼(魂)을 자주 말씀해오셨는데요.

“요즘엔 연극 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요. 상업 연극을 하거나, 뮤지컬을 하는 것보다 순수 연극을 하면 돈벌이도 안 되고 힘든 게 사실이지요. 그래서 순수 연극이 이 시대에 안 맞는 예술이라고도 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연극을 할 때 ‘혼’을 넣지 않고 대충하니까 그런 거예요. 희랍시대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예술이 연극이에요. 몇천 년이 지나도 아직 고스란히 살아있다는 건, 연극이 모든 무대 예술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도 결국은 연극에서 파생한 장르예요.”

시국 상황 탓에 ‘혼’이라는 말이 웃음거리가 됐으나, 그에게서 혼은 여전히 순수의 영역인 듯했다. 그의 이야기 끝은 대부분 연극에 대한 찬사였다. 시쳇말로 ‘기-승-전-연극’이라고나 할까.

―연극이 침체해 있다고 합니다. 연극 말고도 즐길 수 있는 장르가 많고, 오락거리가 넘치는 세상이라서 그런 걸까요.

“연극을 더 잘 만들면 됩니다. 관객이 떠나가는 것은 잘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연극은 집단 예술이에요. 각 영역에서 다 잘해야 감동을 줍니다. 작품은 좋은데 배우들이 연기를 못하거나, 배우들이 웬만큼 해도 연출이 제대로 안 되면 잘못 만드는 거지요. 연극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살아있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겁니다. 똑같은 90점짜리라면, 산 사람과 호흡하며 같이 보는 연극이 영화보다 10배쯤 더 감동이 있을 겁니다. 물론, 잘 만들었을 경우를 말하는 겁니다.”

―산울림 소극장을 개관한 지 벌써 30년이 넘었네요.

(1980년대에 대학생으로 산울림의 연극을 봤을 때, 작은 극장에서 큰 문화적 행위를 한 듯이 만족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처음엔 연습장을 하나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저와 오랫동안 작업을 함께하며 무대미술을 했던 고 장종선 선생이 유럽, 일본에서처럼 소극장을 만들어보라고 권유하더군요. 그래서 살고 있던 집을 팔아 극장을 만들고 그 위에 생활공간을 마련했지요. 우리나라에선 예나 지금이나 무대가 귀합니다.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면 대관료도 내야 하고, 어려운 일들이 많지요. 극장이 있으면 그런 어려움이 줄어들어 좋습니다. 산울림 소극장을 개관한 이후 정부에 예술활동 지원금을 신청하지 않았어요. 극장 없이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신청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거지요.”

―극장 운영이 어려울 때 폭파하고 싶다고 하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아니, 내가 미쳤나요. 어떻게 해서 만든 건데 폭파를 하겠어요. 너무 어려우니까 그걸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누가 폭파한다 그러면 등을 떠밀겠다’고 했어요. 돈도 없는 개인이 극장을 지어서 연극을 하려는데, 그게 잘 굴러가지 못하니까. 저는 연극을 하면서 지인들 덕을 참 많이 봤어요. 극장 개관 때도 신문사 다닐 때의 친구 등 지인들의 후원이 있었어요.”

그는 인터뷰 중에 “평생 연극을 하는 데는 주변 분들의 도움이 컸다”는 말을 수차례 되뇌었다. 그가 6·25전쟁 중 부산에 피란을 가서 학교 예술제에서 연극을 상연한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휘문고에 다닐 때 부산으로 피란을 갔었지요. 부산 사람들이 그 와중에도 예술제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학교도 학예회를 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당시 교장 선생님이 ‘휘문이 전통 있는 학교인데 피란 왔다고 기죽을 거 없다. 한번 해 봐라’고 하시더군요. 아마 세상 물정 모르는 우리가 일주일쯤 지나면 포기할 것이라 여겼던 듯싶어요. 나는 휘문 선배인 백두진 재무장관과 박종화 서울신문 사장을 찾아갔지요. 연극 공연에 필요한 기부금을 받기 위해서였어요. 두 분도 부산으로 피란 와 계셨지요. 백 장관께서는 당황하셨지만, 신선하게 여기셨던 듯싶습니다. 얼마나 필요하냐고 하시기에 일단 100만 원을 불렀지요. 당초 20만 원을 목표로 50만 원을 부를 작정이었지만, 분위기가 좋으니 더 부른 것이지요. 백 장관이 ‘이 사람아, 장관월급이 얼만데 100만 원이야’하기에 ‘아, 요새 장관님이 월급 가지고 생활하십니까’하고 받아쳤습니다. 순간 내가 건방지게 오버했구나, 아차 싶었는데, 그분이 막 웃으시며 ‘이 사람이 큰일 날 사람일세’하고 50만 원을 적어줬습니다.”

역사소설가로 유명했던 박종화 사장은 그에게 20만 원을 줬다. 그러면서 부산에서 외과의원을 하는 동기생 이근영 박사를 소개해줬다. 이 박사는 그에게 기부금을 주면서 “자네, 이해랑을 아는가”라고 물었다. 배우이자 연출가였던 이해랑의 연극을 본 적이 있다고 답하자, 이 박사는 “그놈이 내 자식일세”라고 했다.

―평생 연극을 하셨지만, 신문기자와 방송국 프로듀서를 직업으로 갖고 계시기도 하셨더군요. 요즘 말로 하면 ‘투잡’이네요.

“연극을 하기 위해 서라벌 예술대학에 가서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연극은 당장 돈이 안 되니 직업이 필요하더군요. 이왕이면 내가 하는 연극에 도움이 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신문사에 취직해 문화부 기자를 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동아방송 개국 때 이직을 해서 PD를 했지요. 나중에 KBS로 옮겨서 19년을 일하게 되지요. 방송 일에 익숙해지고 나서 연극을 병행했어요. 내가 맡은 방송 일을 충실히 하기 위해 자주 밤샘 작업을 했어요. 그렇게 하고 남는 시간에 연극을 했지요. 평균점 이상으로 방송 일을 하면 괜찮지 않냐는 게 제 생각이었지요. 방송 일에 문제가 생기면 관두려고 했어요.”

KBS 내에선 그의 ‘투잡’을 두고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평을 하는 직원에게 한 간부가 “이 사람아, 그런 유능한 연출가가 KBS 직원이라는 게 오히려 자랑스러운 거 아냐”라고 말한 이후로 그의 연극 활동은 암묵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와 관련, 그는 “되돌아보니, 내가 살아오면서 너그러운 선배들의 덕을 참 많이 봤다”고 했다.

―문화 선진국들은 연극과 같은 순수예술을 적극 지원합니다. 우리 정부도 문화융성을 내세웠는데 현장에선 오히려 지원이 줄었다더군요.

“정부의 지원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적은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서구 국가들의 경우도 한때는 다 어렵게 연극을 했습니다. 정부가 지원을 팍팍 해주면야 아주 좋겠지만, 그런 지원이 없이도 연극을 해야 그게 진짜 하는 겁니다. 정부에서 돈을 다 대줘서 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인 블랙리스트에 임 선생님도 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는지요.(금관문화훈장을 줄 정도의 공로가 있는 그를 이 정부가 블랙리스트에 올린 게 사실이라면 우리 시대의 ‘웃픈’ 코미디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보도가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난 반정부적인 일을 한 게 없어요. 내가 하는 작품은 순수 연극이지,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것은 안 합니다. (산울림 극단 홈페이지엔 ‘보수 속의 진보 정신’으로 좋은 연극을 만들어왔다는 표현이 있다. 이건 연극을 만드는 정신을 말하는 것이지, 이념 지향 표출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런데 내 이름이 왜 리스트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블랙리스트란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나는 상관없어요. 보는 사람 마음이니까. 나는 그저 연극을 잘하면 그만입니다. 거창한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내가 연극을 잘해서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대한민국의 문화 수준을 평가받는 것 아닌가요. 그걸로 족합니다.”

―대통령 탄핵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이번 일로 우리 국민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지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나라가 어려워도 나는 연극하는 사람이니까, 연극이라도 제대로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해법이 나올 것이라고 봐요. 속상한 건 있지만, 내가 있는 동네에서 자기 일을 안 하고 있을 순 없지요. 정치가 시원찮을 때엔, 그에 관한 생각은 각자 나름대로 하되 자기 분야에서 제대로 하는 게 나라를 살리는 길이 아닌가 합니다. 각 분야, 각 영역에서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더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좀 어려운 질문을 해보죠. 현대사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필 때 한국의 미래, 특히 문화의 앞날은 있다고 보십니까.

“우리 문화 수준은 조금씩이지만 나아지는 쪽으로 왔어요. 우리 역사를 보면, 일제 식민통치와 남북 분단, 6·25전쟁 등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잘 헤쳐 왔어요. 참 뛰어난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예술 쪽으로 보더라도 지금 해외에 나가면 괜찮은 수준으로 평가받습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 이렇게 성공한 나라가 있나요. 대한민국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미래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60년간 연극을 해 보니 인간이 뭐라는 게 보입니까.

“삶을 들여다보는 예술 중 가장 가까운 게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 있는 인간이 무대 위에서 펼치는 삶을 보면서, 관객들이 ‘아, 저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 ‘저렇게 살면은 안 되겠지’하는 것이니까요. 인간이라는 건 조물주가 만든 최고의 창조물입니다. 산다는 건 힘들고, 또 한없이 깊습니다. 연극을 통해 그걸 절실히 느껴왔습니다. 그래도 이쯤 되니, 인생이란 것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긍정의 기운을 무대를 통해 계속 전하고 싶습니다.”

그는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해 “현대사회에서 방황하는 인간을 무대에 올려놓고 사람과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고도’를 1969년 초연한 이후 매년 공연하셨습니다. 올해도 무대에 올리십니까.

“물론입니다. 봄에 할까, 가을에 할까 생각 중입니다. 기본 틀은 초연 때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연출가인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에 따라, 또 무대 위 배우들의 삶과 생각에 따라 작품 해석이 달라질 것입니다. 올해 함께할 배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프로야구 듣는 취미는 여전하신가요. 애주가로도 유명하신데.

“일본 프로야구를 좋아해서 몇십 년째 라디오 중계를 들어왔습니다. 동아방송 PD를 그만뒀을 때 방송에 출연해서 야구 해설을 한 적도 있어요. 지금도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습니다. 술은 정말 좋아하고, 또 센 편이에요. 취해서 추태를 부린 적이 없어요. 한창때는 매일 마셨지만, 건강 때문에 한동안 끊어야 했지요. 요즘은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만 마셔요.”

인터뷰 = 장재선 문화부장 jeijei@munhwa.com

정리 =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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