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정치이념의 요체 임금과 신하의 역할은 무엇
[고구려사 명장면-10] 293년 9월, 봉상왕의 아우 돌고는 자결하고, 그의 아들 을불(乙弗)은 도망하여 민간에 몸을 숨겼다. 아우가 자신의 왕위를 넘볼까 두려워한 봉상왕이 돌고를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전 해에 봉상왕은 즉위하자마자 삼촌인 안국군 달가(達賈)를 죽였다. 달가는 서천왕 때 변경을 침입한 숙신을 제압하고 복속시키는 큰 공을 세운 인물로서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었는데, 이에 불안감을 느낀 봉상왕이 삼촌을 음해하여 죽인 것이다.
그런데 중천왕과 서천왕 때에도 왕의 동생들이 반역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죽음을 당한 것을 보면, 연이어 삼촌과 아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꼭 봉상왕 개인 탓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왕의 동생들도 왕위계승권 범주에 들어 있어 아직 부자 왕위계승의 원칙이 불안정한 상황이 원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달가와 돌고의 억울한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애통해했다고 하니, 두 인물 모두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른 경우와 좀 달랐다. 즉 이 두 사람의 죽음에는 봉상왕의 의심 많은 성격이나 시기심이 더 많이 작용하였던 듯하다.
그냥 여기에 그쳤다면 봉상왕은 나름대로 왕위를 지켜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봉상왕은 점점 민심과 동떨어진 길을 걸어갔다. 예컨대 298년과 300년에 거듭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는데도, 봉상왕은 오히려 백성들을 동원하여 왕궁을 화려하게 중축하여 백성들이 도망하는 폭정이 이어졌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간하였고, 마침내 국상 창조리(倉助利)도 "대왕께서 굶주린 백성들을 토목 일로 고달프게 하는 것은 백성들의 부모인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충언하였다. 하지만 봉상왕은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자리로서,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라고 대답하며, 오히려 "지금 국상은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하니,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겠느냐?"라고 위협하였다.
사실 봉상왕이 삼촌과 동생을 죽인 것도 그들만큼 백성들의 신망을 얻지 못해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민심을 얻기보다는 화려한 궁실 같은 권력의 허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폭정으로 민심이 멀어진 것이 아니라, 민심을 얻지 못한 자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정을 벌이는 법이다.
그러면 봉상왕에게 쫓긴 을불은 어찌되었을까? 왕자 출신이라는 신분을 감출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을불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가장 빈한한 백성이 된 셈이다. 이런 을불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당시 고구려 일반 민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삼국시대 백성들의 삶을 담은 사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으로 볼 때 이런 을불의 행적을 담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맨손뿐인 을불은 먼저 머슴살이로 시작하였다. 수실촌(水室村)에 사는 음모(陰牟)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는데, 음모는 낮에는 일을 고되게 시키고, 밤에는 돌을 던져 연못의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시켰다. 이런 고된 생활을 견디다가 일년 만에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장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아마 삶의 기반을 잃은 많은 백성들이 을불처럼 어려운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물론 을불을 고용한 음모라는 인물처럼 다소 부유한 농민도 있었다.
을불이 고된 생활을 1년 동안 견딘 것은 고용살이 계약기간이 1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1년 동안 을불은 얼마간 밑천을 마련하여 소금장사를 시작한 듯하다. 압록강과 비류수(혼강)를 오르내리며 5년여 동안 장사를 하던 중 하루는 사수촌의 한 할멈 집에 묵었다가 그만 농간에 빠져 도둑질로 고소를 당하였다. 을불은 압록태수 앞에 끌려가 곤장을 맞고 소금도 다 빼앗기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때 국상 창조리가 을불을 찾으러 보낸 신하들 눈에 띄어 다시 도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창조리는 곧 군신들의 뜻을 모아 봉상왕을 폐위하였고, 마침내 을불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바로 미천왕이다.
그런데 미천왕하면 우리는 313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하여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중국 군현을 종식시킨 업적을 먼저 떠올린다. 사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미천왕대 기사를 보면 온통 대외관계에서 이룩한 업적들뿐이다.
단순히 낙랑군, 대방군만 병합한 것이 아니라, 현도군을 공격하고 당시 요동 땅에서 떠오르고 있는 선비 모용씨와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이고 있으며, 모용씨를 견제하기 위해 후조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등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미천왕의 대외활동은 갑자기 비약한 듯한 면을 보인다.
왜냐하면 봉상왕 때에만 하여도 모용외의 군대가 두 차례나 고구려를 침공하여 봉상왕이 피신하고, 수도 국내성 깊숙이 쳐들어와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는 수난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천왕이 즉위하자 고구려는 대외활동의 반경이나 공세적인 입장 등 전세가 확 달라졌던 것이다.
이는 군사, 외교적인 전략만이 아니라, 탄탄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갑작스러운 비약적인 변화는 결국 미천왕의 정치력이나 사회통합력에 힘입은 바가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여기서 앞서의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대왕의 신정(新政), 고국천왕에서 동천왕, 그리고 미천왕으로 이어지는 '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고구려 나름의 독자적인 정치 이념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나중에 따로 살펴보겠지만, 이는 광개토왕비문의 '국부민은(國富民殷)'으로 귀결된다.
이런 고구려 정치 이념의 요체를 국상 창조리의 입으로 직접 들어보자.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이고,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성된 것이 아닙니다." 1700년 전 고구려인의 말이 오늘 우리에게도 새삼 마음에 와닿는 것을 보면, 바른 정치를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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