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일, 젊은시절 원조 꽃미남 가수 인증 "가요사 최초 선글라스 썼다"

한예지 기자 2016. 12. 27.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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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일

[티브이데일리 한예지 기자] 가수 윤수일이 뛰어난 입담부터 녹슬지 않은 노래 실력을 뽐냈다.

27일 방송된 KBS1 'KBS 네트워크 특선뮤직토크쇼 가요 1번지'에는 가수 윤수일이 출연했다.

윤수일은 가요계 원조 꽃미남 가수로 1977년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데뷔해 '터미널' '아파트' 등 엄청난 히트곡으로 사랑받았다. 현재까지 24집을 낸 싱어송라이터다. 이날 윤수일의 과거 활동 당시 모습이 공개됐고, 젊은시절 할리우드 배우 뺨치는 뚜렷한 이목구비로 눈길을 끌었다. 윤수일은 "지금은 할배가 됐다"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그때 집 앞에 신문지 깔아놓고 소녀 팬들이 노숙을 하고 그랬다"고 했다.

이어 '터미널'에 얽힌 사연을 밝히기도 했다. 윤수일은 "곡을 쓰고 가사를 쓰다보면 거짓말을 못한다. 경험과 옛 추억이 묻어난다. 출세에 눈이 어두워 첫사랑을 버리고 떠나는 남자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거다. 몇 년 활동 열심히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장생포로 찾으러 갔다. 이미 다른 사랑을 찾았더라"고 했다.

MC 조항조는 노래는 시대상을 담고 있다며 윤수일의 히트곡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짚었다. 이촌 현상이 심화됐던 시기였고, 윤수일은 "제가 뉴웨이브, 사이키델릭, 트로트고고 등을 접목해서 도시화된 느낌이 많이 났다"고 했다. 대표적인 곡은 '아파트'였다.

윤수일은 노래 도입부에 띵동이란 초인종 소리가 나는 아이디어를 누가 냈느냐는 질문에 "아파트란 특이한 곡을 만들어놓고 제목과 전주도 좀 다른게 없을까 생각했다. 그때 마침 누군가 띵똥하더라. 요구르트 아주머니였다. 그때 아파트를 상징하는 건 초인종 소리 아니겠나 싶어 초인종을 떼서 녹음실에 가져갔다. 그렇게 탄생했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윤수일의 도시 가요 '제2의 고향' 또한 작곡 에피소드를 밝혔다. 그는 "한 달 동안 공연 투어를 했다. 긴 여정을 마치고 서울로 오며 제3한강교를 들어서는데 남산타워의 빛과 흘러가는 한강의 불빛 등이 눈에 들어오며 '집에 다 왔구나' 생각했다. 제2의 고향이 됐구나 싶어 바로 수첩을 꺼내 가사를 적었다"고 했다.

이어 '황홀한 고백'은 세계적으로 댄스 열풍이 불 때였다. 그는 "우리 나라에도 칼군무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가수를 앞에 놓고 무용단이 똑같이 춤을 추는 무용을 짜보자 싶어 처음 시도를 했다"고 했다. 그때 목 꺾기 춤이 나왔던 것.

당시 윤수일은 "가요사 처음으로 선글라스를 처음 시도했다. 그랬더니 벗으라는거다. 예의가 벗어난 게 아니다. 착용을 좀 하자고 계속 실랑이를 했다. 몇가지 더 잇었다. 민소매를 처음 입고 나가니 그것도 안 된다고 하고, 방송국에서 두발검사까지 했다. 열 받아서 더 빡빡 밀고 올라간 적도 있다"며 80년대 당시 방송계 검열 사태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현실과 부딪히기도 하고 타협하며 가요 문화가 발전해왔다"고 했다.

이어 윤수일은 즉석에서 라이브 기타 연주를 하며 '숲 바다 섬마을'을 불렀다.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록 창법으로 화끈한 무대를 완성한 그였다.

윤수일은 가수가 된 계기에 대해 "중학교 2학년 때 노래 경연대회가 열렸는데, 가발을 쓰고 참석했다. 무조건 1등 아니면 2등을 했고, 친구들이 자연스레 응원을 해줐고 노래 부르고 상품을 받아오라고 했다"며 "하지만 어머니가 반대를 많이 하셨다. 이북서 피난하며 혼자 장생포에 정착하셨다. 다문화 가정에 대한 편견이 큰 시대 속에서 자랐고, 전 기타를 치고 노니 어머니가 기타를 부셨다. 하지만 제겐 성장기에 기타가 유일한 탈출구였다. 어머니는 이를 이해 못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끝내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직접 매니저가 되어주셨다고.

그랬던 윤수일은 '윤수일과 솜사탕' 그룹사운드를 결성 1977년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발표하며 단숨에 폭발적 인기를 끌고 현재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의 위치까지 이르게 된 것.

윤수일은 부산에서 엔터테인먼트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도 "38년 서울 생활을 하고, 변화가 필요하단 생각에 부산에 터를 잡았다. 좋은 후배들을 후원하는 것도 하나의 일환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티브이데일리 한예지 기자 news@tvdaily.co.kr/사진=KBS1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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