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오브 풋볼] '터프함과 아름다움의 조화', 1990년대 후반 유벤투스의 레전드 3인방
[헤럴드경제 스포츠팀=김유미 기자] 1990년대 중반부터 칼치오폴리 스캔들이 터진 2006년 사이의 시기에 세리에A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른바 ‘세븐 시스터스(Seven Sisters)’라고 불리는 세리에A의 7공주가 있었다. 유벤투스, AC밀란과 인터밀란, AS로마, 라치오, 파르마, 피오렌티나가 그 멤버였다. 7개 팀이 돌아가면서 스쿠데토(세리에A의 우승팀이 다음 시즌 유니폼 중앙에 붙이는 방패 문양)를 차지했고, 챔피언스리그와 슈퍼컵의 주인공도 언제나 7공주였다.
세리에A는 그야말로 스타 풍년이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공격수로 호나우두,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등이 있었고, 미드필더로는 지네딘 지단,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수비수로는 프랑코 바레시, 파올로 말디니, 파비오 칸나바로 등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축구를 주름잡았다.
‘7공주’ 중에서 유벤투스는 이 황금기 동안 가장 많은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가장 이탈리아다운 축구를 구사하는 팀이었다. 특히 창의적인 전술을 시도하면서 여러 팀들의 본보기가 됐다. 유벤투스에는 ‘터프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했고, 이 중심에는 현재 레전드로 불리는 3인방이 있었다.
![첼시 감독으로 좋은 시기를 보내고 있는 안토니오 콘테는 선수시절 거칠고 파워풀한 중앙 미드필더였다. [사진=FIFA홈페이지]](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t1.daumcdn.net/news/201611/11/ned/20161111080105460uqdw.jpg)
안토니오 콘테 - 싸움닭, 백스리 장인이 되다
지금은 첼시 감독으로 더욱 유명한 안토니오 콘테(1969년생)는 유벤투스에서 터프함을 담당했다(지금은 가발을 쓴 까닭에 온화해 보이지만 선수시절은 정말 터프했다). 주로 중앙 미드필더 포지션을 맡았지만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 선수생활 내내 꾸준한 활약을 보였으며 강한 승부욕으로 집요한 플레이를 펼쳤다. 리더십도 있어 리피 감독 체제에서 한때 주장 완장을 달기도 했다.
콘테는 이탈리아의 US레체에서 유소년 선수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1985년 세리에A에 데뷔했고 7시즌을 보내면서 71경기에 출전했다. 1991년에는 유벤투스로 이적해 2004년 은퇴할 때까지 쭉 한 팀에서 지냈다. 콘테는 유벤투스 유니폼을 입고 세리에A 5회, 코파 이탈리아 1회,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4회, 챔피언스리그 1회 등 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또 은퇴 직전이었던 02-03시즌의 활약은 팀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려놓으면서 동료들에게 베테랑 선수로서 큰 귀감이 됐다.
유벤투스 홈구장인 유벤투스 스타디움에는 헐리우드의 명예의 거리를 본따 만든 명예의 거리가 있는데, 여기에 팬들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레전드 50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안토니오 콘테도 그 중 하나로 에드가 다비즈, 잔루이지 부폰,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지네딘 지단, 파벨 네드베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콘테는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이탈리아 국가대표로 20경기에 출전했다. 1994 미국 월드컵 준우승과 유로 2000 준우승으로 메이저 대회 경력을 쌓았지만 선수생활 내내 그를 따라다닌 무릎 부상으로 많은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2004년 선수 은퇴 후 지도자로 전향한 콘테는 2006년 세리에B의 AC아레초에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첫 팀에서의 성적은 좋지 않았고 팀은 강등됐다. 2007년에는 FC바리를 맡아 강등권의 팀을 중위권으로 올려놨고, 08-09시즌 세리에B 챔피언이 되면서 세리에A 승격을 이뤄냈다. 2009년 9월에는 아탈란타로 부임했지만 강성 서포터들과 마찰을 빚으며 3개월 만에 물러났다. 다음 행선지는 시에나였다. 여기서는 10-11시즌 세리에B 우승을 이끌며 팀을 세리에A로 승격시켰다.
마침내 콘테는 2011년 5월 자신의 친정팀 유벤투스의 지휘봉을 잡게 된다. 이전까지는 중소 구단에서 공격적인 축구를 시도하던 콘테지만, 유벤투스로 옮겨오면서 ‘백스리 장인’으로의 인생을 시작했다. 윙백과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들을 적절히 활용한 그의 전술은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부임 첫 시즌인 11-12시즌 세리에A에서 무패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세 시즌 연속 우승을 달성했는데, 13-14시즌 우승 당시 유벤투스는 승점 102점을 기록하면서 세리에A 최초 승점 100점 이상을 기록했다. 유벤투스에서 콘테의 승률은 68%에 달했다.
콘테는 이탈리아 국가대표 감독으로도 활동했는데, 아쉽게도 유로 2016 성적은 8강에 그쳤다. 대회 직전 첼시와 계약을 마친 콘테는 유로 2016 직후 첼시의 사령탑에 올랐고, 현재 콘테의 첼시는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다투는 강팀으로 탈바꿈했다.
![화려한 플레이로 예술적인 축구를 선보였던 유벤투스의 판타지스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사진=UEFA홈페이지]](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t1.daumcdn.net/news/201611/11/ned/20161111080105617mlzb.jpg)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 이 시대 마지막 판타지스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1974년생)는 90년대 최고의 판타지스타로 불렸다. 그보다 앞서 유벤투스에서 활약한 로베르토 바조가 판타지스타의 시초이며, 델 피에로는 마지막 판타지스타로 통한다. 델 피에로는 17세에 세리에B의 칼초 파도바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아마추어 시절에는 골키퍼로 축구를 시작했는데, 골키퍼를 하기에는 174cm의 작은 키가 걸렸고 예상치 못한 공격능력을 갖추고 있어 친형의 권유로 공격수로 전환했다. 칼초 파도바에서는 2시즌 동안 1골에 그치며 부진했지만 당시 최고의 팀이었던 유벤투스가 델 피에로를 영입했다.
유벤투스 입단 후 델 피에로는 파르마와의 데뷔전에서 해트트릭을 작성하며 신성의 탄생을 알렸다. 화려한 드리블 기술과 창의적인 패스로 ‘제2의 로베르토 바조’라는 별명을 얻었다. 주전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득점을 터트리면서 유벤투스의 리그 우승에 일조했다. 1995년 바조가 팀을 떠나면서 주전 자리에 오른 델 피에로는 창의적인 패스와 공격 시도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97-98시즌에는 리그 32경기 21골, 시즌 47경기 32골을 기록하면서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는 98-99시즌 세리에A에서 일어난 약물파동의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슬럼프에 빠졌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하면서 시즌 8경기 출장에 그쳤다. 하지만 그는 빠르게 회복했고, 이탈리아 국가대표로 등번호 10번을 달고 출전한 유로 2000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유벤투스에 대한 델 피에로의 애정은 각별했다. 2006년 승부조작으로 팀이 강등됐지만, 그는 주장 완장을 찬 채 세리에B로 내려갔다. 이 때 델 피에로는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 법이다”라는 명언을 남겼고, 함께 팀에 남은 잔루이지 부폰, 파벨 네드베드와 함께 세리에B 우승을 이끌며 다시 세리에A로 복귀했다. 이때 세리에B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세리에A 복귀 첫 시즌에서도 21골을 터트려 2년 연속 득점왕에 올랐다.
08-09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해 레알 마드리드와의 맞대결에서 두 골을 터트리면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고, 마라도나, 호나우지뉴와 함께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몇 안 되는 원정팀 선수가 됐다. 이후로 몇 년 동안 암흑기를 거친 유벤투스였지만, 11-12시즌 콘테 감독 부임과 동시에 무패 우승을 이뤄냈고, 델 피에로는 이 시즌 주장으로서 마지막으로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그는 유벤투스 소속으로 리그 6회 우승, 코파 이탈리아 1회 우승, 수페르코파 이탈리아 4회 우승 등을 경험했고 UEFA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세리에A 득점왕, FIFA 역사상 최고의 선수 100인 등에 선정되기도 했다. 11-12시즌을 끝으로 델 피에로는 이탈리아를 떠났고, 호주와 인도를 거쳐 2014년 은퇴했다.
![지네딘 지단은 유벤투스에서 비상을 준비했고, 프랑스 국가대표팀과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이 됐다. [사진=FIFA홈페이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t1.daumcdn.net/news/201611/11/ned/20161111080105778eyiw.jpg)
지네딘 지단 - 스타 감독이 된 스타 선수
레알 마드리드에서 간판선수로 활약했고, 지금은 감독을 맡고 있는 지네딘 지단(1972년생)도 유벤투스를 거쳐 갔다. 14세에 AS칸의 유소년 선수로 선수생활을 시작했고, 17세에 리그에 데뷔했다. 92-93시즌 보르도로 이적해 4년을 뛰면서 UEFA 인터토토컵과 UEFA컵 준우승을 거머쥐었고, 이때 팀 동료였던 빅상트 리자라쥐, 크리스토프 뒤가리와 함께 1998 프랑스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유벤투스 감독이었던 마르첼로 리피 감독은 지단의 플레이에 반해 그를 영입했다. 지단은 델 피에로, 디디에 데샹, 파울로 소사 등과 함께 96-97, 97-98시즌 유벤투스의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끌었고, 이 두 시즌에 세리에A 우승컵도 동시에 차지했다.
유벤투스에서 이름을 알리며 성장한 지단은 유로 2000에서 프랑스의 우승을 이끌었고, 2001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인 7,500만 유로(한화 약 942억 원)를 기록하며 큰 화제가 됐다. 이적 후 첫 경기인 레버쿠젠과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바로 그 환상적인 발리슈팅으로 골을 터트리며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이후 호나우두, 데이비드 베컴, 루이스 피구, 라울 곤잘레스, 이케르 카시야스 등과 함께 레알 마드리드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리그 우승 횟수는 적었지만 갈락티코의 일원으로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다.
지단은 본인의 대표 팀 은퇴 경기였던 2006 독일 월드컵 결승에서 그 유명한 박치기로 퇴장을 당했고, 그대로 국가대표 커리어를 마감했다. 당시 상대 팀이었던 이탈리아의 마르코 마테라치와 연장 후반 말싸움을 벌이던 중 화를 참지 못한 지단이 머리로 마테라치의 가슴에 박치기를 시도했고, 지단의 다이렉트 퇴장으로 프랑스는 월드컵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선수 은퇴 후 지단은 레알 마드리드에서 기술고문, 스카우터, 객원 코치, 사무총장, 2군 팀 감독 등 중책을 도맡았다. 그리고 지난 1월 베니테즈 감독의 후임으로 부임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이 됐다. 15-16시즌 프리메라리가 19라운드 데포르티보 전에서 감독으로 데뷔했는데 5-0 완승을 거뒀고, 부임 첫 해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두 번째 시즌인 16-17시즌 현재에도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17경기 연속 무패행진을 이어오고 있다.
1990년대 유벤투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3인방에 대해서는 ‘축덕들이 만드는 팟캐스트 해축야화 39화’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다. 해축야화는 매주 금요일에 1부가, 토요일에 2부가 업로드 되며, 팟캐스트 어플 ‘팟빵’을 통해 들을 수 있다.
* 레전드 오브 풋볼은 축구 팟캐스트 ‘해축야화’의 한 코너입니다. 아래 URL을 클릭하면 바로 방송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0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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