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국내성 천도 시기 산상왕·신대왕때가 유력?
그후 고구려는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국내성은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시 일대이다. 집안에 가보면 국내성과 산성자산성을 비롯하여 7000여 기의 고구려시대 고분이 온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가장 오랫동안 도읍지였던 역사의 내력을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면 언제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을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유리왕 22년(기원 45)에 천도했다는 이런 내용을 전하고 있다.
유리왕 21년에 제사에 희생물로 쓸 돼지가 도망치자, 담당 관리가 이를 뒤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 잡았다. 그가 돌아와 유리왕에게 보고하기를 "국내 위나암은 산이 험하고 물이 깊으며, 땅이 오곡을 기르기에 알맞고, 사슴과 물고기가 많이 납니다.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면 백성에게 크게 이롭고 병란도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유리왕이 직접 국내 지역을 시찰했고, 이듬해에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국내성 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꾸민 듯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제사에 쓸 희생물인 돼지를 등장시켜 마치 국내 천도가 하늘의 계시라는 점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건국 초기의 어수선한 상황이지만 도읍을 옮기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기에, 이렇게 무언가 그럴싸한 천도의 이유를 밝히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럼 위나암성은 어디일까? 지금 집안시 일대에서 찾는다면 산성인 산성자산성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는 다음 기록과 그리 맞지 않는다.
대무신왕 11년(서기 28)에 한나라의 요동태수가 쳐들어 오자 대무신왕은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수십 일 동안 굳게 지켰으나, 점차 적의 포위에 군사들이 지쳐갔다. 이때 신하 을두지가 꾀를 내어 말하기를 "한나라 군사들이 우리 성안에 샘이 없다고 생각해 우리를 포위하고 궁핍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술과 함께 보내는게 좋겠습니다" 하였다. 그렇게 하자, 한나라 장수는 성 안에 물이 있어 금방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위 이야기 정황을 보면 성안에 샘이 있는데, 이를 한나라 군이 잘 알 수 없는 상황이어야 한다. 그런데 집안시의 산성자산성은 성밖에서 성안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구조라서, 위 이야기가 성립할 수 없다. 더구나 <삼국사기>에는 산상왕이 198년에 환도성을 쌓고, 209년에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 환도성이 바로 산성자산성이 된다. 즉 위나암성과 환도성이 같은 곳이 되어 서로 모순이 생긴다. 오히려 위 이야기의 정황과 잘 맞는 곳은 바로 졸본의 오녀산성이다. 그렇다면 유리왕 때 국내성으로 천도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게다가 2000년대 들어 중국에서 집안시 국내성을 발굴 조사해보니 3세기 초 이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도 유리왕대 천도는 부정된 셈이다.
그럼 언제 국내성으로 천도했을까? 여기서부터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먼저 태조대왕 때라는 견해가 있다. 모본왕과 태조왕 사이에 왕계가 단절되는 면이 있는 등 태조왕이 시조적 모습을 갖고 있으니 이때 국내성이 졸본을 대신하여 도읍지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여러 정황으로는 가장 그럴 듯하지만, 앞서 고고학적 조사와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209년에 산상왕이 환도성을 쌓고 도읍을 옮겼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바로 국내성 천도를 가르킨다는 주장도 나왔다. 더욱이 중국 역사책 <삼국지>에는 산상왕이 "새로 나라를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산상왕 때 천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근사하게 맞는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산상왕의 아버지인 신대왕 때, 그 다음 고국천왕 때에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명확하다. 이미 졸본이 도읍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산상왕 이전에 국내성으로 천도해야 앞뒤가 맞는다. 그래서 최근에는 신대왕 때 국내로 천도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아직 논거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새롭게 검토해볼 만한 견해이다.
이렇게 언제 국내성으로 천도했는지조차 그리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정도이다. <삼국사기> 기록은 많은 부분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지만, 어떤 부분은 정치적인 목적이나 정통성을 위해 변개된 기록도 함께 담겨 있다. 커다란 정치적 사건일 수밖에 없는 국내성 천도 기록이 바로 그런 사례의 하나이다. 역사의 진실을 찾는 작업은 바로 그런 변개를 걷어내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한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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