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덕기자의 맛있는 맥주이야기] ② '국산맥주'는 억울하다.
[서울신문]
“한국 맥주는 북한의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
이 모든 일은 4년 전 겨울, 한국에 거주하는 한 외국인의 한 마디에서 시작됐습니다. 지금은 한국 크래프트맥주 업계의 ‘큰손’이 된 다니엘 튜더(영국)가 글로벌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의 한국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2012년, 튜더는 잡지에 한국을 소개하면서 “먹거리는 화끈한데 맥주는 따분하다”고 지적했습니다. 튜더의 말에 한국 맥주 소비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국맥(국산맥주)’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았죠. “한국 맥주는 돼지오줌 맛”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나왔을 정도였으니까요. 한국에 본격적으로 크래프트맥주가 상륙한 게 2013년 무렵이었으니, 당시 튜터의 발언이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도 맛있는 맥주에 대한 수요가 폭발 직전이었던 시기와 맞물렸기 때문입니다.
튜더의 발언 이후 한국 맥주계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2014년 초 주류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소규모 양조업체가 만든 술의 외부 유통이 가능해졌고, 한국의 크래프트맥주는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기존에는 맥주 생산 업체가 대기업 2~3곳에 불과했다면 현재 소규모맥주양조장, 이른바 ‘크래프트맥주브루어리’라 불리는 업체들이 50~60개에 달합니다. 게다가 이 브루어리(양조장)들은 주로 기존 대기업이 만들어온 ‘라거(Lager)’ 스타일의 맥주에서 벗어나 ‘페일 에일(Plae ale)’ ‘인디안 페일 에일(Indian plae ale)’ ‘스타우트(Stout)’ ‘사워 에일(Sour ale)’ 등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창의적인 레시피로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해외 경험이 풍부한 세대(20대 후반~30대 초반)가 사회 생활을 해 경제력을 갖추면서 맥주 매니아층도 넓어졌고 이들의 구매력도 세졌죠.
그럼에도 여전히 “국맥은 맛없다.”는 인식은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국맥이란, 소규모브루어리의 맥주가 아니라 하이트진로, OB 등 ‘대기업 맥주’를 뜻합니다. 크래프트맥주가 빠르게 대중화되고 있다고는 하나 편의점이나 집 근처 슈퍼에 가면 여전히 하이트,카스가 맥주 코너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국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맥주의 맛’을 알게 된 순간 선뜻 손이 가지 않게 됐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마트에 따르면 2011년 17%에 불과하던 수입맥주 매출이 지난해 38%까지 증가했고, 올해 전체 맥주 매출에서 수입맥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44%까지 늘어났습니다. 이는 대기업이 해외맥주까지 공격적으로 유통하면서 맥주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소비자의 ‘맥주 고르는 눈’이 높아진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과연 국산맥주는 진짜 맛이 없는 걸까요?
전문가들은 “한국 맥주는 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이 부족한 것”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맥주의 종류는 수백가지에 달하는데, 그동안 한국 대기업은 ‘라거’ 스타일 맥주 생산에만 주력해왔습니다. 라거는 낮은 온도에서 발효되는 효모를 이용해 만든 맥주로, 밝은 황금빛에 청량감, 시원한 목넘김, 약한 홉과 몰트(맥아)맛이 나는 것이 공통된 특징입니다. 쉽게 말해 라거는 ‘밍밍한 맛’으로 먹는 맥주라는 것이죠. “국맥은 밍밍하다”는 비판이 있다면 그것은 대기업 맥주들이 거의 ‘라거’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연재에 소개한 묵직하고 쌉쌀한 맛의 임페리얼 스타우트 스타일<참고-맥덕기자의 맛있는 맥주이야기 ① ‘최순실 맥주, 올드라스푸틴’>과는 정반대되는 성격의 맥주죠. 크래프트맥주가 한국에 알려지기 전까지 국내 소비자들은 수백가지의 맥주 스타일 중 밍밍한 맛의 ‘라거’맥주만 먹어온 것입니다.
라거로서 ‘국맥’의 퀄리티는 해외 대기업 라거 맥주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는 않습니다. 크래프트맥주펍을 운영하는 이승용 퐁당크래프트비어컴퍼니 대표는 “맥주를 직접 만드는 사람으로서 한국의 대기업 맥주들이 칭다오, 하이네켄, 스텔라, 아사히 등 해외 유명 라거 맥주와 비교해 맛 자체는 전혀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동안 ‘국맥’이 맛이 없다는 소리가 나오자 맥주를 만드는 공법이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는데, 공법은 맥주를 만드는 방법 중 하나 일뿐 맛과 직결되는 요소가 아니”라고도 지적했습니다. 한국 대기업 주류 회사들은 주로 ‘하이그래비티 공법(맥주의 도수를 높인 뒤 물을 타서 만드는 방식)’으로 맥주를 만드는데, 아사히나 밀러, 버드와이저 등 세계적인 맥주 회사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맥주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대기업 맥주는 여전히 과점 상태이며,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 제조, 품질 개선 등 앞으로도 과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원한 라거스타일의 맥주가 먹고싶다면 ‘국맥’을 마시는 것이 ‘가성비(가격대비성능)’ 측면에서는 탁월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낮은 온도로 서빙되는 라거맥주는 신선함과 관리가 생명입니다. 생맥주의 유통기한이 보통 6개월이니 맛있는 ‘국산 생맥주’를 먹고싶다면 손님이 많아 테이블 회전율이 높은 가게에서 먹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래도 맥주 케그를 자주 교체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편의점에서 맥주를 구매한다면, 캔 아래에 써 있는 맥주 제조일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한달 이내에 생산된 맥주가 가장 맛있습니다. 라거는 보관을 오래할수록 맛이 변질될 확률이 높습니다. 또 하나, 호프집의 맥주 보관 상태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평소 상온에 맥주를 두다가 순간 냉각기를 사용해 서빙하는 것보다는 냉장고에 계속 보관한 맥주가 더 맛있는 편입니다. 자, 이제 선입견을 버리고 ‘국맥’을 마음껏 즐길 차례입니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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