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줄리엣의 발코니

올해가 셰익스피어 400주기여서 그런지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관심이 어느 해보다도 뜨겁다. 북이탈리아의 베로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비극은 원수 집안 남녀의 슬픈 사랑을 다룬 영원한 고전이다. 영화만 해도 올리비아 허시가 출연한 1960년대 고전부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미끈한 로미오를 연기한 현대판까지 종류가 많다. 샤를 구노가 프랑스어로 만든 오페라, 프로코피예프가 곡을 붙인 발레도 유명하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뉴욕 맨해튼의 어퍼웨스트에서 펼쳐지는 20세기 버전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변형된다 해도 절대 바뀌지 않는 게 있다. 2막에 나오는 발코니 장면이다. 파티에서 줄리엣을 만나 첫눈에 반한 로미오가 이튿날 줄리엣의 집을 찾아가 그녀를 기다린다. 줄리엣이 창가 발코니에 나타나자 로미오가 그녀에게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고, 두 사람은 설레는 마음으로 첫 데이트를 즐긴다. 실제로 베로나의 카펠로 거리 23번지엔 관광객을 위해 여관 건물을 개조해 '줄리엣의 집'이라는 걸 만들어 놨다. 거기도 줄리엣의 방에만 발코니가 붙어 있다.
정작 원작엔 발코니가 등장하지 않는다. 후대에 만들어진 가공의 산물인 셈이다. 하긴 어느 귀족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딸 방 창문에 발코니를 달아 놓겠는가. 그건 유혹자들에게 너무나 손쉬운 출입 통로가 될 텐데. 아마 어느 연출가가 아이디어를 냈을 거다. 줄리엣이 창문만 연 채 손을 흔드는 것보단 발코니에 기대 로미오를 보는 게 훨씬 로맨틱할 거라고 말이다.

이젠 발코니를 뺀 '로미오와 줄리엣'은 상상도 못 한다. 오페라에서 가장 달콤한 아리아도, 발레의 애절한 2인무도 여기서 등장하니까. 아예 '발코니 신'이란 고유명사로 불리는 장면들이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인기곡 '투나잇'도 이 대목에서 나온다. 셰익스피어가 부활해 줄리엣의 발코니를 보면 어떨까.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하리라. 그는 작가인 동시에 누구보다도 아이디어가 넘치던 연극인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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