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 경제위기 생각만 하면 속 타.. "교육 바뀌어야 나라 바뀌어"

따거(大哥).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중국어로, ‘큰형님’이란 뜻이다. 그를 겪어본 언론인과 후배 관료들이 지어줬다. 큰 키와 강렬한 인상, 선 굵은 리더십이 만들어낸 존칭일 것이다. 쑥스러운 기색이면서도 “기쁜 표현”이라고 그는 말했다. 후배들은 그에게 왜 그런 존칭을 붙였을까. “다른 선배에게 볼 수 없는 인간적 풍모와 어려운 일에 맞서는 기질 때문이 아닌가 싶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자평처럼 그는 화통하고 선이 굵은 경제관료로 정평이 나 있다.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정권에 걸쳐 장관직에 기용되는 관운이 따른 것도 이런 평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는 노무현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 이명박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다.
그가 중책을 맡을 때 세월은 순탄치 않았다. 경제사령탑, 기재부 장관을 맡은 2009년 2월은 글로벌 금융위기 한복판이었다. 금감위원장 시절(2004 ~ 2007년)엔 신용카드 거품이 터진 ‘카드사태’(2003년) 후폭풍과 ‘부동산 광풍’이 몰아쳤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엔 차관보급인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이었다. 국가부도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리였다. 아시아개발은행(ADB) 이사로 밀려나 5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지금 한국경제는 다시 위기다. 흙먼지 같은 온갖 악재들로 앞길이 뿌옇다. 세상은 위기에 익숙한 그에게 답이 뭐냐고 묻는다. 안 그래도 ‘나라 걱정’에 그의 마음은 편치 않은 터다. 그의 표현처럼 “노후를 즐기고 인생을 정리해 나가야 할 나이(70)”에 그는 현역처럼 고민하며 대안을 찾고 있다.
그의 근황이 궁금해 서울 여의도 ‘윤(尹)경제연구소’를 찾았다. 2011년 6월 기재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스스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함수, 복지와 성장의 좋은 접점을 논하는 공간”이라며 만든 연구소다. 그는 개소 당시 지인들에게 보낸 초청장에서 “최전방의 경제동향을 관찰하는 연구소로, 경제학 고전을 뒤져 경장(更張·개혁의 의미)의 논리를 닦는 서재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퇴임하고도 여전히 바빠 보인다.
“상황이 그렇잖은가. 2008년 위기 이후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복원력을 보이는 건 미국뿐이다. 한국은 재화를 수출해서 먹고사는 나라인데 대외환경이 너무 어렵다. 그런 터에 정치·사회·문화환경은 어떤가. 역대 최악이다. 내우외환에 직면한 총체적 위기 국면이 현재 상황이다. 최대 과제는 일자리다. 청년실업률이 9%를 넘어가고 있다. 이는 공식통계일 뿐 취업준비생, ‘알바생’까지 다 포함하면 훨씬 심각할 것이다. 어떤 대안을 내놓아야 할지 정말 걱정이다.”
“정부는 이런 상황이 닥치도록 무얼 했는가.” 윤 전 장관은 골든타임을 허송하고 컨트롤타워조차 없는 정부의 무능과 무위를 개탄했다. 조선·해운 구조조정만 해도 2013년 정부 출범과 함께 바로 했어야 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그때 아무것도 안 했고 그래서 뒤늦게 일이 번지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또 “그나마 컨트롤타워가 있어야 구조조정이 될까 말까 한데 지금 보면 임종룡 금융위원장만 쩔쩔 매고 있다”면서 “순서가 거꾸로 됐다”고 지적했다. “산업 재편 구상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자금문제, 실업문제가 나와야 하는데 컨트롤타워가 없다보니 순서가 바뀌었다”는 얘기다. 금융위와 채권단 주도로 구조조정이 한창인 지금도 산업 재편의 밑그림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그는 “공든 탑이 무너지듯 나라 경쟁력이 추락하는 게 눈에 보이고 있다”고 개탄했다.

―지금도 나라 걱정이니 공직자가 천직인가.
“그렇지 않다. 중·고교 시절 내꿈은 영화감독이나 소설가였다. 고2 때 하숙방에서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밤새 읽었는데 반도 못 읽어 하루 학교를 가지 않았다. 선생님이 가보라고 해 친구 두 녀석이 왔더라. 그때 막바지를 읽고 있었다. 다 읽는 데 하루 하고 반나절이 걸렸다. 그 정도로 그 소설에 푹 빠졌던 거지.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해 극장에 몰래 들어갔다가 합동단속반에 걸려 교무실에서 야단맞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내가 만든 영화배우 앨범을 돌려보더니 ‘영화감독할 녀석이니 봐주자’고 하더라.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꿈이었다.”
그가 소설가의 꿈을 포기한 것은 대학 입시 때였다. “서울대 입시에 작문이 있었다. 문제가 이효석 선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동이가 허생원 등 장사꾼들과 달빛 아래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을 걸어가는 장면을 묘사하라는 거였다. 우리 서울고 친구들은 쾌재를 불렀다. 존경받는 국어 선생님이 그 단편을 가장 좋아해서 달달 외울 정도로 그 작품을 소개했다. 작문 시험을 맞힌 셈이다. 그런데 반전이 뭐냐 하면 막상 쓰려니 두세 줄을 못 나가겠더라. 지우고 또 지우고, 한시간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소설가의 꿈을 포기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물론 부모님 희망도 고려했고.”
―고교 시절 모범생 스타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순탄치 않았다. 마산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서울고)를 다녔는데 문화적 차이가 컸다. 폭력사건에 휘말리기도 했고, 고통스럽고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보따리를 몇 번이나 쌌다 풀었다. 처음 놀란 게 첫 중간고사가 어려워 다들 점수가 낮게 나오자 몇몇이 선생님에게 ‘점수 좀 올려 달라’고 하더라. ‘그럼 다들 올려줘야 할 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했더니 ‘야, 인마. 너는 서울에 혼자 있으니 괜찮겠지만 우린 점수에 따라 부모님 대접이 달라진다’고 하더라. 그때 느낀 게 ‘대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절대 큰 인물이 되지 못하겠구나’ 하는 거였다. 제도화·규격화한 생활에선 대자연의 호연지기가 몸에 밸 수 없다는 걸 느낀 거지.”
대학생활도 순탄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법대 학생회장,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경찰서와 안기부(국정원 전신)에 끌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왜 잡혀가셨냐”는 물음엔 “그 얘기는 안 하겠다. 지금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함구했다. 그는 당시를 “빈 깡통에 소리만 요란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입학한 1965년은 ‘6·3 한일외교협정’의 반발 여진이 있을 때였다.

―왜 판검사가 아니고 경제관료를 택했나.
“행정부로 갈까, 사법부로 갈까 고민하다 결국 사회 변화를 주도하는 건 행정이라고 판단해 그 길을 선택했다. 당시 경제 개발이 가장 중요한 이슈였고 우리 사회의 최대 숙제였다. 가난은 어떻게든 극복해야겠다 싶어 그 길을 택했다.”
윤 전 장관이 요즘 가장 공을 들이는 분야는 예상밖에도 교육이다. 그는 “분야별 과제 중 가장 심각하고 총합적으로 대처할 문제가 교육”이라고 강조했다. “도전과 창의를 꽃피워야 할 시점에 우리는 아직도 주입식·암기식 교육에 머물러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윤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 4대 개혁 중 하나가 교육개혁인데, 도대체 어떻게 개혁하자는 건지 들어본 적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게 교육이다. 민간 주도의 교육개혁위원회에 참여해 개혁안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내년 대선에서 우리 개혁안을 수용하는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원회는 윤 전 장관과 이주호 전 교육부 장관, 전직 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 총장, 교육학 교수, 고교 재단 이사장, 중·고교 교사 등 열댓 명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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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퇴임하고도 ‘나라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다. 현역처럼 고민하며 대안을 찾는 중이다. 윤 전 장관이 그가 만든 ‘윤경제연구소’에서 진행된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상윤 기자 |
“다보스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 현존하는 직업 중 700만개가 사라지고 기술 진보로 200만개가 새로 생긴다는 전망이 나왔다. 500만개의 직업이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준비하고 있나. 고등교육자만 양산하고 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을 보면 대졸 이상이 37%, 고졸 이하가 63%인데 우린 거꾸로다. 실업자가 넘쳐나는데 중소기업은 구인난이다. 이 자리를 외국 산업연수생들이 메운다.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있는데 밑바닥에 교육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에게 교육철학이 있는지부터 너무너무 많은 과제가 쌓여 있다. 중산층이 경제적으로 붕괴되는 단초도 사교육비다. 예전엔 공교육이란 희망의 사다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다 무너졌다. 없는 사람이 그 비싼 사교육을 받아가며 공부할 수 없다.” 윤 전 장관은 “고등학교만 나와도 기술을 배워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생을 즐길 때도 되지 않았나.
“은퇴한 친구들과 그런 얘기 한다. 일은 후배들이 하지 않겠나. 신문 보고 흥분하지 말자고. 그런데 그게 잘 안 돼. 자꾸 흥분하고 분개하고. 그래도 즐기려고 노력한다. 주말엔 용문(경기도 양평) 텃밭에 가서 농사짓는다. 가지, 고추, 부추, 수박, 참외, 블루베리 등 여러 작물을 심었다. 농사도 보통일은 아니다. 5개월 된 외손자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기저귀 갈아주고 손자 돌보느라 집사람 고생이 많지만. 가끔 골프도 치는데 내 별명이 ‘골프 저능아’다. 늘 100타를 넘긴다.”
―정계로 진출하실 생각은 없나.
“추호도 없다. 이제 인생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다. 정치인의 길이 있고 관료의 길이 있다. 자기 갈 길을 가야지.”
류순열 선임기자 ryoosy@segye.com

△1946년 경남 마산 출생 △서울고 △서울대 법대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대 행정학 석사△재무부 금융실명제 실시준비단장, 세제실 심의관, 증권국장, 금융국장 △재정경제원 세제실장, 금융정책실장 △아시아개발은행(ADB) 이사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 △기획재정부 장관 △윤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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