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의 맛] 대를 이으며 더 승승장구하는 두부집

글=권혜진 작가(장사의 맛) 2016. 9. 29.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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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옥' 최요한·최요섭 사장..최상품 콩을 포기하지 않는 고집이 비결

외식시장의 전설로 불리는 사장님들이 들려주는 '장사의 철학', 그들의 이야기가 "장사나 해 볼까?" 생각하는 창업 꿈나무들과 장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700만 자영업자들에게 장사의 대한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칼럼을 시작한다. [편집자 주]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우리 엄마는 두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엄마가 즐겨하던 두부요리는 마파두부나 두부두루치기 같은 음식이었다. 우리 집은 된장찌개에도, 김치찌개에도 두부가 빠진다.

반면 친할머니는 두부 요리를 자주 하셨다. 밭에서 거둔 콩을 삶고 맷돌에 갈아 손두부를 만드셨는데 두부를 만드는 날 저녁 메뉴는 몽글몽글한 하얀 순두부였다. 두부는 그냥 먹어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고 순두부는 양념만 살짝 쳐서 먹었는데,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어린 내 입에도 동네 구멍가게에서 사 먹던 두부와는 차원이 달랐다. 너무 맛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아련하게 남아 있는 두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해 준 집이 백년옥이다. - 물론 그 이전에 속초 초당 순두부를 먹어본 적이 있다- 예술의전당 바로 앞에 있는 '백년옥'은 말하지 않아도 직접 두부를 만드는 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위치 때문인 지 예술의전당에서 공연 좀 해봤다는 혹은 공연 좀 봤다는 예술인들 중 '백년옥'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예술의전당 앞에서 25년간 장사했지만 정작 최요한 사장은 공연을 딱 한번 본 게 전부란다. 1년 365일 자기시간을 내기 힘든 게 음식장사인 건 분명한가 보다.

맑은 바닷물인 청간수와 우리 콩을 사용해 옛날 방식 그대로 만든 순두부를 먹다보면 두부의 원래 맛을 깨닫게 된다. 빨갛게 양념한 순두부와는 차원이 다르다. 하얀 순두부는 심심하고 고소하다.

'대미필담(大味必淡)'이라는 표현이 있다. '맛있는 것은 반드시 담백하다'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 돌덩이 같던 아버지의 손

최요한, 최요섭 형제의 아버지 최평길 씨는 그릇 장사를 하다가 사업이 어려워지자 식당을 해보려고 전국 방방곳곳 맛집을 찾아 다녔다. 그러던 중 설악산 아래 속초 학사평의 초당 순두부집을 방문하게 되었단다. 다들 알고 있는 속초의 그 유명한 하얀 순두부집이다. 당시 그 집 영감님이 뒷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었는데 그걸 돕다가 인연이 돼서 서너달 그 집에서 두부 만드는 걸 배웠다고 한다.

그 기술을 서울로 갖고 올라와 1991년 지금의 본점 자리 2층에 두부전문점을 열었다. 야외 파라솔까지 테이블 여덟 개가 전부인 작은 가게였다. 사람을 두고 할 만큼 여력이 없던 터라 3남 1녀 어린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손을 보탰다.

어려운 상황에 시작한 식당이라 두부 만드는 기계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불린 콩을 맷돌로 갈아서 손으로 직접 짰기 때문에 최평길 부부의 손은 늘 퉁퉁 불어 있었다. 막내아들인 최요섭 사장은 미국에서 돌아 와 아버지의 손을 3년 만에 잡게 됐을 때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버지 손이 정말 돌덩이 같았어요.너무 딱딱해서."

주인 손은 혹사당했지만 손님들 입은 즐거웠을 것이다. 뭐든 기계보다는 핸드메이드가 더 맛있는 법이니까.

80년대만 해도 많이 먹고 비싼 음식 먹는 게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90년대 초 웰빙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두부전문점이었던 '백년옥'은 건강에 민감한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돌았고 당시만 해도 서울 시내에 두부전문점이 거의 없었던 터라 나름 주목을 받았다.

패션계의 거물 故 앙드레 김의 단골집으로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끼니때마다 줄서는 손님들로 1층 카센터는 영업이 힘들 정도였다. 더불어 부부가 콩을 손으로 직접 짜서 만들다 보니 나오는 순두부의 양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장사가 잘 됐지만 먹고 살만해 진 건 나중 일이었다. 가게가 너무 협소했던 이유다. 이후 카센터 자리였던 1층과 새로 문을 연 별관은 모두 본관 인근에 위치해 있다. 순두부 가게만 세 개고 팥칼국수와 팥죽을 먹을 수 있는 각각 하나씩 총 네 개의 가게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재밌는 건 같은 기계에서 같은 시간에 뽑아낸 순두부인데 손님들은 본관에서 먹을 때 더 맛있어 한다. 끼니때랑 상관없이 본관이 유독 붐비는 이유다. 그래서 가게를 옮기거나 확장하면 사람들은 '음식 맛이 변했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 시련은 나의 힘

'백년옥' 최요한·최요섭 사장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1980년대 중후반, 하던 사업이 어려워지자 최평길 씨 부부는 미국으로 이민 갈 계획을 세우고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최요한 사장을 누나와 함께 먼저 미국으로 보냈다.

부모도 없이 타국에서 적응하기 어린 나이였지만 응석 부릴 여력이 없었다. 갈수록 아버지 사업은 힘들어졌고 집안 살림은 더욱 더 기울어져 가는 상황이었다. 급기야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자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들어왔고 한국엔 아버지와 큰아들만 남게 된 것.

집안형편이 어려워지자 미국에 있던 최요한 사장은 열일곱 살 때부터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피자배달부터 빌딩청소, 막노동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아르바이트는 열여덟 살 때 해군 배 밑바닥 페인트를 벗겨내는 일이었는데 정말 힘들었죠. 하지만 당시 임금이 시간당 11달러. 90년대 초라 한국은 아르바이트비가 시간당 800원 할 때였으니 제겐 큰돈이었죠. 세금도 안 떼고 현금으로 줘서 꽤 짭짤했습니다."

어린 아들이 막일을 하러 간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크게 반대를 했다. 일도 힘들거니와 기차를 타고 1박 2일, 먼 길을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고집이었는지 최요한 사장은 편지를 써놓고 몰래 일을 하러 갔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두부가게를 열게 되자 다른 가족들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최요한 사장만은 홀로 미국에 남았다. 오랜 고생 끝에 자리를 잡은 시간이 아까워서였다. 그러나 가족이 모두 떠나고 홀로 있는 생활은 고통스러울 만큼 외롭고 힘들었다. 결국 1993년 최요한 사장도 한국행을 한다.

"미국생활 6년은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죠. 하지만 좋은 경험이었던 거 같아요."

그 고단했던 경험이 '백년옥'을 이끄는 최요한 사장에게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대를 이은 형제가 부모 잘 만나서 대박 식당을 물려받았다고 쉽게 말한다. 창업 당시부터 가게 일을 함께 했으니 그냥 받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받았다고 해서 쉽게 장사가 되는 건 아니다. '백년옥'은 형제들이 이어받은 후 더 승승장구하고 있다.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저희 집 음식은 특별할 게 없어요. 요리 방법도 인터넷 검색으로 충분히 알 수 있고요. 다만 양심을 가지고 건강한 식재료를 사용하는 게 비법이면 비법이겠죠."

두부요리의 주재료가 되는 콩은 강원도 양구, 철원 등지에서 수급 받는다. 두부 만들 때 쓰는 간수는 강원도 속초까지 직접 차를 끌고 가서 떠 온다니 그 정성이 가히 놀랍다. 물론, 쌀과 김치도 100% 국산이다.

"김치 겉절이에 들어가는 고춧가루, 새우젓도 우리 것을 사용합니다. 색깔이나 모양만 봐도 국산인지 수입산인지 알 수 있죠. 맛도 확실히 다르고요."

대를 이은 형제들은 아버지보다 더 깐깐하게 맛을 지켜가고 있다. 건강한 식재료만이 웰빙음식을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희 집 자랑이라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국산 콩만 쓰고 있다는 겁니다."

국산 콩이 비싸다는 건 다들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콩으로 만든 두부는 서민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가격 저항이 크다. 아무리 장사가 잘 돼도 수익이 생각만큼 많지 않은 이유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떼돈 벌겠다고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콩 가격이 올랐다고 섣불리 음식 값을 올릴 수 없는 게 두부 집들의 딜레마다. 음식 값은 천원, 이천원에도 상당히 예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꼭 국산 콩이어야 할까?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기에? 최요한 사장은 '고소한 맛'이 떨어진다고 했다.

"강원도 콩이랑 해남 콩도 맛의 차이가 있습니다. 콩 맛이 두부 맛을 절대적으로 좌우하죠."

콩 작황이 좋지 않아 한 자루에 50만원을 호가할 때도 있었지만 최상품의 콩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고집이 25년, 2대를 이어올 수 있었던 '백년옥'의 가치다.

이 집의 곁들임 반찬도 '백년옥'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다.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아 뒷맛이 깔끔하면서도 개운하다. 많이 삭히지 않은 김치와 소금으로 간을 한 콩나물 무침, 미역무침과 무생채 등 4가지가 기본이다.

다 알겠지만 두부는 밭에서 나는 소고기라고 불리는 콩이 원재료라서 건강에 좋다.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두부만 먹으면 요오드가 빠져나가고 심하면 골다공증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걸 막아주는 게 해조류다. 두부를 미역이나 다시마 같은 해조류와 함께 먹어야 하는 이유다. 두부전문점을 내세운 식당들이 제대로 하는 집인지 아닌지 구분하려면 곁들임 반찬으로 해조류가 있는 지 확인해 보면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손님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손님들이 맛있게 그리고 배부르게 먹고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식당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말하는 형제가 불문율처럼 지키고 있는 또 하나는 다른 식당과 가격경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가격 경쟁을 하다보면 음식의 질이 떨어지거나 양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식당 주인에게 음식은 자존심이다. 세상에서 가장 부질없는 것이 자존심 싸움이고 그것은 결국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남기게 될 것이다.

형제들이 식당의 새 주인으로서 더욱 더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주고 있으니 최평길 부부로서는 이보다 든든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다른 꿈이 있지는 않았을까?

"이게 우리 가족의 유일한 생계였기 때문에 아무런 불평 없이 너도나도 붙어서 일을 했던 거 같아요. 그랬던 것이 이제는 삶이 됐고, 우리가 이어가야 할 가업이 된 거죠. 다른 생각은 안 해본 것 같습니다."

◇ 누구에게나 장사는 어렵다

아무리 고생하고 살았어도, 장사로 잔뼈가 굵은 형제에게도 장사는 여전히 힘들다.
특히 손님 상대하는 일은 도 닦는 일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은 장소에 따라 태도가 변하는 것 같습니다. 비싼 음식점 가면 군말 없이 줄서면서 두부 집에서는 조금만 기다려도 화를 내고 줄을 서지 않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주차 직원에게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붓는 손님에게 화낸 경험을 떠올리면서 최요한 사장은 씁쓸해한다.

우리는 식당에 왜 가는가? 음식을 먹으러 간다. 물론 돈 내고 먹지만 식당에서 갑질하거나 나만 대접받겠다고 행패를 부리는 건 진상이다. 그런 진상은 다른 데 가서 부리자. 다른 데 어디? 음식 값은 정말 비싼데 맛은 형편없는 곳?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글=권혜진 작가(장사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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