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을 달고 싶었지만 포기했던 이유

정환봉 한겨레21 기자 2016. 9. 10. 13:43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디어 현장] 정환봉 한겨레21 기자

[미디어오늘 정환봉 한겨레21 기자]

2014년 4월16일. 육아휴직 중이었다. 한 달쯤 됐을 때다. 아침에는 아마 버섯이나 당근 따위를 저미며 이유식을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딸 아이의 아침, 점심, 저녁밥을 챙겨 먹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얼핏 간단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손에 익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세월호 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그렇게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걱정스러워 텔레비전을 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원 구조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오보였다. 그날, 거대한 비극이 잉태됐다.

같이 일했던 동료 기자들이 진도로 내려갔다. 가끔씩 물기어린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오는 후배들과 통화를 해야 했다. 그들이 맞닥뜨린 슬픔을 온전히 알 수는 없었다. 아마 코끼리 발톱만큼도 몰랐을 것이다. 다만 얼마나 거대할 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부끄럽지만 피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깜냥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꿈틀거려 본 것이 정보공개청구였다. 4월19일부터 해경과 항만청 등에 50여건의 정보공개청구를 했다. 어떤 것은 비공개 결정이 나기도 하고 일부는 공개되기도 했다. 취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땐 뭐라도 할 일이 필요했다.

그 해 9월 복직을 하고도 세월호 참사와 오랜 기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때때로 슬퍼하고, 분노하며 뭐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비켜서 있고 싶다는 욕망이 월등했다. 더 유능한 사람이 이 일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2년을 길 모퉁이에 숨어 있다 등이 떠밀렸다. 지난 4월 <한겨레21>에 발령이 났다. 안수찬 편집장은 세월호 참사 취재를 담당하라고 했다. 정은주 기자가 2년에 걸쳐 취재하고 수사기록을 입수해 ‘진실의힘’과 함께 여러 차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기사를 보도한 뒤였다. “안 된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끝내 토해내지는 못했다.

막막한 상황에서 기댈 곳은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뿐이었다. 하지만 특조위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노골적 조사 방해가 있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한 활동 만료 시점인 6월30일부터는 조사관들의 월급도 출장비도 나오지 않았다. 특조위의 활동 기간을 보장하는 세월호 특별법 개정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여소야대 국회라는 말이 무색했다. 특조위는 세 번째 청문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해양수산부는 특조위가 청문회를 열 권한이 없다고 발표했다. 어렵게 섭외한 청문회 장소는 취소됐다. 정부의 외압 때문이라는 말이 나왔다.

순탄치 않은 길을 돌아 9월1일~2일 세월호 3차 청문회가 열렸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정부 쪽 증인의 불출석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새로 조사하고 분석한 내용들을 공개했다. 하지만 일종의 강박이 보였다. 특조위는 청문회에서 사고 직후 선내 공기주입에 사용된 호스의 직경이 19mm에 불과하고 실제 공기 주입이 이뤄진 곳은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조타실이었다고 밝혔다. 특조위가 새로 밝혀낸 내용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새로 드러난 사실은 아니었다. 2014년 4월18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공식 브리핑 자료를 보면 “상부 조타실로 추정되는 선체 내에 19mm 호스연결을 성공하여”라고 적혀있다. 실수였을 것이다. 특조위를 탓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강박이 무엇인지만큼은 코끼리의 온몸을 직접 보고 더듬은 것처럼 또렷하게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 청문회에서는 해경과 경찰의 세월호 피해자 사찰 정황도 나왔다. 특조위가 공개한 자료는 2014년 4월20일이 가장 빨랐다. 휴직 시절 정보공개청구를 한 문서 중에는 해경이 참사 당일인 4월16일부터 정보관을 대거 진도로 파견한 정황이 담긴 문서가 있었다. 주요 업무는 ‘실종자 가족 동향 파악’이었다. 아직 보도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이 사실을 앞세워 기사를 썼다. 그리고 인터넷에 기사를 올릴 때쯤 갈등했다. 고민의 핵심은 디지털팀에 ‘단독’이라는 꺽쇠를 달아 기사를 내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할 지였다. 자랑 따위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래야 이 소식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볼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망설임 끝에 하지 않았다.

▲ 정환봉 한겨레21 기자

처지가 슬펐다. 대형 사고의 진상을 파악하는 일이 왜 새롭고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내 사람들의 이목을 조금이라도 끌어내려는 강박으로 귀결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도 아직 감당하기 어려운 유가족들이 왜 대형 사고 이후 당연히 뒤따라야 할 사고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20일씩 단식을 해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부가 사고 이후 흘러간 2년5개월의 시간 중 어느 한 순간에라도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강박과 고통이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비극이다. 그래서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사를 취재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어설픈 실력이 원망스러워도 피하기는 어려워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청문회 현장을 지킨 동료 기자들이 아직 많았다는 것이다. 전원 구조 오보라는 멍에를 내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같이 짊어지고 갈 수는 있겠다는 희망을 잠시 가져봤다.


[미디어오늘 바로가기][미디어오늘 페이스북]
미디어오늘을 지지·격려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Copyrights ⓒ 미디어오늘.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Copyright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