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정섭 "저도 외롭고 불안한데 천재 화가 이중섭은 훨씬 더했겠죠"
[경향신문] ㆍ10일 막 오르는 ‘길 떠나는 가족’ 이중섭 역 윤정섭
ㆍ‘이윤택 키드’에서 극단 간판배우로 성장
ㆍ이중섭 탄생 100년 추모 연극 주연 맡아

그는 ‘고독한 날라리’처럼 보인다. 멍한 시선으로 담배라도 한 대 피워 물면 영락없이 애인에게 걷어 차인 백수건달의 분위기다. 때로는 능글맞고 야비한 남자의 표정이 징그럽게 드러난다. 하지만 외모가 그렇다는 얘기다. 실제로 배우 윤정섭의 성실함은 극단 내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극단 연희단거리패 김소희 대표는 “무대에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배우”라고 평했다. 극단의 예술감독인 연출가 이윤택은 “겸손한 성품, 예술가의 순정한 영혼을 간직한 배우”라고 말했다.
올해는 화가 이중섭의 탄생 100주년, 아울러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창단 30주년이다. 그래서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길 떠나는 가족>(이윤택 연출, 10~25일)은 불행하게 살다 간 천재에 대한 추도와 극단의 30주년 자축을 동시에 내세운 연극이다. 이름도 ‘중섭’과 비슷한 배우 윤정섭이 무대의 주인공으로 나선다.
지난 6일 시연회에서 만난 윤정섭은 영락없는 이중섭이었다. 그는 허무한 표정에 구부정한 등, 그러다가 폭발적으로 절규하면서 ‘가난과 싸우던 요절한 천재’를 재현했다. 마침 그날은 1956년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운명한 이중섭의 기일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부담스럽고 막막했습니다. 제가 ‘이중섭’을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두려웠어요. 그분의 삶과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달할 자신이 없었던 거죠. 사실 얼굴도 별로 안 닮았잖아요. 선생은 턱이 길어서 일본 유학 시절에 ‘아고리’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한데 저는 보시다시피 턱도 짧고(웃음). 그런데 제가 배우로서 느끼는 외로움과 불안이 화가 이중섭이 생전에 느꼈던 바로 그런 감정이었던 것 같아요.”
배우생활 10년째에 접어든 그는 스승 이윤택의 말마따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스타일이다. “좋은 역할로 호평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나는 갈 길이 먼 배우”라고 했다. 연희단거리패에서 배우의 첫발을 내디딘 이후, 이제 이 극단의 간판격 배우로 성장한 그는 사실상 연출가 이윤택에 의해 다듬어진 ‘이윤택 키드’다. 그래서 이윤택은 그에게 “하나의 세상”이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극단에 들어왔어요. 이 선생님이 ‘무대’라는 세상에 저를 처음으로 던져놨습니다. 연습할 때 혼자 객석에 앉아 쳐다보고 계시는데, 저한테는 객석을 꽉 채운 관객이 공연을 보고 있는 것과 다름없어요. 선생님을 감동시켜야 관객도 감동하거든요. 아마 우리 극단 단원들이 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윤정섭은 마지막 말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호랑이 스승’에 대한 무서움과 신뢰가 동시에 묻어났다. 지금까지 출연작 중에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손꼽은 것도 모두 연희단거리패의 연극이다. “<피의 결혼>을 잊을 수 없죠. 남의 아내를 결혼식 직전에 가로채는, 충동적인 사랑의 행각을 벌이는 인물이었는데 그런 일탈적 욕망이 제 마음속 어딘가에도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았던 <햄릿>도 기억에 남아요. 6개월간 그 배역을 상상하고 준비하던 과정이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었죠. 또 김소희 선배가 연출한 <갈매기>는 제대로 연기를 하려면 얼마나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지, 많이 고생할수록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줬죠.”
물론 윤정섭이 연희단거리패의 작품에만 서온 것은 아니다. 국립극단의 <리처드 2세>(펠릭스 알렉사 연출·2014년), 지난해에는 투르게네프 원작의 <아버지와 아들>(이성렬 연출)에 출연해 호평을 들었다. 올해에도 <길 떠나는 가족>이 끝나는 대로 국립극단이 11월 공연하는 <미스 쥴리>의 연습에 합류한다. <길 떠나는 가족>에서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 예술가의 순수한 열정을 보여줬던 그가 <미스 쥴리>에서는 완전히 변신한다. 현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능글맞은 사기꾼 역할이라고 할 만하다. 윤정섭은 “극장을 나서는 관객으로 하여금 삶을 반추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우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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