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슨의 저주 & 주가 대폭락

이종호 기자 2016. 9. 5.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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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락은 시간의 문제일 뿐입니다. 아주 심각할 겁니다.(Sooner or later a crash is coming, and it may be terrific).’ 고공 비행 중인 주가가 곧 떨어질 것이라는 경고다. 때는 1929년9월5일. 불과 이틀 전인 9월3일 다우존스 지수가 381.17로 최고점을 기록한 직후다. 메사추세츠 웰스리 소재 뱁슨 대학에서 열린 전국 경영인대회에 참석해 오찬을 즐기던 중 ‘주가가 하락할 것’이라는 예고를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엇보다 문제 발언의 주인공인 로저 뱁슨(Roger Babson·1875~1967)을 믿지 않았다. 걸핏하면 주가 하락을 공개적으로 경고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뱁슨은 주식 하락을 예고할 때마다 ‘제가 지난 해부터 줄곧 말해왔듯이’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쓸 만큼 시장 상황을 안 좋게 봤다. 뱁슨은 왜 이런 발언을 했을까. ‘불황을 헤쳐 나갈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두의 관심사였던 주식 시장을 애써 거론한 것으로 보인다.

뱁슨은 직접 투자회사를 차리고, 주식투자와 관련된 저술도 냈지만 투자 쪽에서는 영향력이 큰 인물은 아니었다. 대신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뱁슨대 설립자로서는 산업체의 관심을 끌었다. 말이 대학이지 불과 1년 과정의 경영학 전문 스쿨(Babson Institute)이었으나 뱁슨대는 설립 당시부터 독특했다. 이론보다는 실습 중심의 실전형 경영학 수업이 매일 아침 8시30분부터 저녁 5시까지(토요일은 오전 수업) 이어졌다.

뱁슨의 발언 내용은 주가 폭락 예고 뿐 아니었다. 캐나다 출신 경제학자인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1908~2006 *그는 주요경제학자 중에서 가장 오래 살고 키도 203㎝로 가장 컸던 인물로 기억된다)는 저서 ‘1929년 대공황’에서 9월5일 뱁슨의 발언을 다뤘다. 갤브레이스에 따르면 “뱁슨은 심각한 경기 침체로 인해 공장이 문을 닫고 사람들이 해고 당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뱁슨은 회의에 참석한 기업인들에게 어려울 때 일수록 유능한 인재가 필요하고 뱁슨대 출신을 고용해 경기 침체에 대응하라고 요청하는 메세지를 던졌던 것이다. 뱁슨대 설립자로서는 당연한 주문이었으나 주식시장은 요동쳤다.

마침 마땅한 기사 거리가 없었던 터. 오후 2시께 뱁슨의 발언이 다우존스 금융소식판을 타고 주식시장에 번졌다. 시장은 바로 폭락했다. US 스틸, 웨스팅하우스 같은 우량주들까지 크게 떨어졌다. 팔자 일변도의 주문이 쏟아지는 가운데 거래량이 평일의 3배에 가까운 200만주에 이르렀다. 뱁슨의 발언 소식이 전해지고 단 1시간 동안 다우존스 지수는 전일의 379.61보다 9.84포인트 낮은 369.77로 내려앉았다. 유달리 더웠다는 1929년 여름 급상승했던 주식시장에서는 경계론이 고개 들었다. 유력 매체 타임지는 뱁슨의 발언이 나온지 5일 뒤 폭락 가능성을 조심스레 점쳤다.

공포가 시장을 뒤덮는 분위기 속에서 낙관론자들이 반격에 나섰다. ‘주가가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고원에 도달했다’고 말해 최고점을 이끌었던 당대의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인 어빙 피셔 교수가 나서 ‘시장이 정신착란증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라며 뱁슨을 맹공했지만 투자자들은 하나둘 월가를 떠났다. 급기야 주식시장은 10월29일 대폭락을 맞았다. 세계 경제는 2차 대전 전쟁특수가 발생하기 전까지 대공황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렸다.

사람들은 폭락의 전주곡이었던 뱁슨의 발언을 ‘뱁슨의 저주’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폭락 장세는 ‘뱁슨의 폭락(Babson‘s Break)’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뱁슨의 저주가 없었다면 대폭락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찰스 킨들버거 교수(1910~2003)등 경제사 연구자들은 독일, 영국 실물 경제의 추락과 국제 금융 공조 실패로 대공황이 불가피했다고 진단한다. 대공황의 요인에 대한 이론이 없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다. 투자자들은 언제나 긍정적인 신호를 원하고 반응한다는 점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전에도 뱁슨과 비슷하게 말한 분석가가 있었다. 시장이 애써 외면했을 뿐이다.

찰스 킨들버거 교수는 공황의 원인과 경로, 파장을 다룬 명저 ‘광기, 패닉, 붕괴 - 금융위기의 역사’에서 ‘금융 위기는 잊어 버릴 만 하만 끈질지게 피어오르는 다년생 풀’에 비유했다. 투자자 모두가 진저리 칠 대폭락이라는 잡초는 투자자들의 탐욕과 비 이성을 먹고 자란다. 대폭락에서 비켜 가는 방법도 여기 있다. 이성적 투자.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사족: 로저 뱁슨은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도 이름을 남겼다. 금주당(Prohibition Party)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 0.12%(4위)를 얻었다. 소련과 핵전쟁에 대비한다며 중력연구소를 설립한 적도 있다. 아이작 뉴턴을 존경해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주식투자에 대입해 책도 썼다. 다양한 인생 궤적을 살았던 뱁슨은 이름은 아직도 기억된다. 교육에 대한 투자 덕분이다. 그가 설립한 뱁슨대학은 1969년 정식 대학으로 승격해 경영학의 강소대학, 창업 분야에서는 최상급 대학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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