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의 장의사'로 보낸 서른 해
수배에 쫓기던 딸은 8장 유서로 남았다. 1987년 2월20일 서울교대에서 학원민주화 운동을 하던 박선영씨가 스스로 목을 맸다. 박씨의 어머니 오영자씨는 죽은 딸의 사주를 들고 점집을 전전했다. “죽어뿐는디도 사주를 보러 다녔어. 암만 내가 생각해도 안 죽었어라. 어디서 살아가고 있어. 사주를 넣었는데 안 죽고 유학 갈 사주라고, 명이 길겠다고, 뭔 딸이 사주가 이렇게 좋냐고 가는 디마다 그래. 일곱 번, 여덟 번을 봤는데 다 똑같이 나와. 그래서 서울로 찾으러 갔어. 선영이 찾으러. 종로고 대학로고 많이 헤맸어. 근디 없으니 어쩔 것이여.”
그제야 오씨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지금부터 선영이는 살고 나는 죽었다. 선영이는 살았응께 선영이가 허던 데모를 내가 할란다. 나는 죽었응께 인자 도저히 밥만 하는 엄마로 못 살겄다.”
그날부터였다. 박씨는 집 근처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학생들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당시만 해도 학교 앞에서는 매일같이 시위가 벌어졌다. 전경들이 데모하는 학생들을 때리면 무조건 뛰어갔다. “너 미쳤나. 어째서 요러고 데모를 하고 댕기냐? 너 찾으러 왔는데 여가 있네.” 오씨는 엄마인 척하고 학생들을 빼내왔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만난 것도 그즈음이었다.

한국 민주화를 이야기할 때 유가협의 이름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다.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삶으로, 몸으로 초석을 놓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유가협이 8월12일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30주년을 맞아 백서 <너의 사랑, 나의 투쟁>(썰물과밀물)도 펴냈다. “분신해서 죽고, 투신해서 죽고, 음독으로 죽고, 고문으로 죽고, 의문사로 죽은 자식들을 끌어안고 사는 부모들”(배은심씨·고 이한열의 어머니)이 모여 자식을 대신해 살아온 세월을 기록한 책이다. 연로한 유가족들을 대신해 르포 작가 송기역·정윤영씨가 인터뷰 및 구술을 맡고 사진과 소식지 자료를 추려서 실었다.
유가협은 ‘재야의 장의사’였다. 날이 밝으면 전국에서 분신하고 투신하고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때마다 유가협 회원들은 그들의 죽음을 내 자식의 죽음처럼 여기고 찾아다녔다. 때로는 당사자 가족보다 먼저 현장을 찾곤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 하나로 끝나야 하는데 내 뒤에 왜 이렇게 많아. 그게 제일로 안타깝더라고.”(정영자씨·고 신장호의 어머니)
올해 2월 영면한 최봉규씨(고 최우혁의 아버지)는 유가협의 30년을 이렇게 회고했다. “혼자 그 일을 당했을 땐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는데 그렇게 모여서 싸우니까 추워도 추운 줄 모르겠고, 전경들한테 맞아도 아픈 줄을 모르는 거야. 내 꺼멓게 탄 속 알아주는 사람들은 죄 모였는데, 그게 얼마나 큰 의지가 되겠어. 한 사람 더하기 한 사람은 둘이 아니거든. 열이 되고, 스물이 되고. 세 배, 네 배, 열 배의 힘으로 막 불어나.”
1998년 11월21일부터 422일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벌였던 천막 농성을 유가협 회원들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는다. 그 결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2000년 1월12일 제정 공포)’이 제정되고 그 법률에 따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유가협 회원들이 가장 바란 것은 민주묘역 조성이었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묘지를 한곳으로 모아놓으면 교육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고 좋겠다 싶었다”라고 장남수 유가협 회장은 말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는 등 부지 선정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지난 6월9일 경기 이천시 모가면 어농리에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이 개원했지만 이는 유가협 다수의 회원들이 접근성 등의 이유로 반대한 장소였다. 결국 대상 136기 중 49기만이 안치되는 반쪽짜리 묘역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가협이 분열되기도 했다.
“유가협 회원 더 이상 늘지 않았으면…”
장남수 유가협 회장의 왼쪽 가슴에는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이 걸려 있다. 30년을 싸웠지만 여전히 부당하게 죽는 목숨이 있다는 게 장 회장을 비롯한 유가협 회원들에게는 늘 마음 아픈 일이다. 유가협이 가장 최근에 받은 회원은 용산참사 유가족들이었다. “예전에는 노동조합도 없고 그러니까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 ‘한울삶’으로 많이 왔고…. 그래도 지금은 우리 아니어도 챙길 사람이 많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재정적 어려움은 있지만, 유가협 회원이 늘어나는 건 원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올 이유로 누구든 죽어서는 안 되는 거니까.”

서울 종로구 창신동 651-30에 위치한 ‘한울삶’은 유가협 회원들의 사랑방이다. 1986년 창립 이후 사무실 한 칸 구하는 일도 녹록지 않았다. ‘빨갱이’ 소리 들어가며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89년 서화전을 기획해 모은 돈에 빚을 보태 지금의 자리에 사무실을 열었다. 한 울타리 속에서 함께 사는 삶을 뜻하는 한울삶이라는 이름은 고 신영복 교수가 지어준 이름이다. 현판 글씨도 신 교수가 직접 썼다.
서울시는 지난 7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무형 자산 372점을 미래 유산으로 지정했다. 한울삶도 그중 한 곳으로 선정됐다. 서울시는 국가에 의해 자식과 가족을 잃고도 보호받지 못했던 민주화운동 유가족의 본부이자 삶터이며, 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난 아픔을 치유하고 상징하는 장소로서 보존할 필요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짙은 어둠 속 희망을 일군 선구자들’ ‘1980년대 5공 독재에 맞선 민중들의 6월항쟁, 그 앞자리의 열사들’ ‘1990년대 민주, 인권, 통일을 향한 전진, 그러나…’라는 글씨가 적힌 3개 디딤돌을 지나 한울삶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액자에 걸린 105명의 영정사진이 가장 먼저 보인다. 이들의 가족이 ‘늦깎이 투사’들인 유가협의 회원이다. 장남수 회장은 회원들의 평균 나이가 80세쯤 될 거라고 말했다. 중년이던 회원들은 30년을 버티는 동안 하나둘 자녀 곁으로 떠나거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 한울삶을 찾는 회원들은 현재 20명 남짓이다.
아들과 딸의 영정이 있는 한울삶은 부모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자식 집’이나 마찬가지다. 부모들 대다수는 한울삶에 오면 영정사진을 매만지며 “야, 엄마(아빠) 왔어”라고 말한다. 전북 정읍에 사는 고순임씨(고 최덕수의 어머니)는 “서울 다른 데는 못 찾아도 한울삶은 눈 감고도 찾아가. 친척네 가면 죽은 자식 얘기도 못하고 그러니까 안 가”라고 말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북적이지는 않지만, 누가 언제와도 머물 수 있도록 한울삶 안에는 사무 공간 외에 이불이나 전기밥솥 등의 세간을 갖춰두고 있다.
‘세월이 약’이라는 속담은 적어도 이들에게만은 틀린 말이었다. 유가족에게 죽은 자녀는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가는 다리였다. 이들의 애도는 먼저 간 자식이 못 이룬 일을 대신하는 것으로 이뤄졌다. “나는 아직도 종철이가 죽음과 맞바꾸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스물세 살의 종철이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나는 그 답을 지금도 찾고 있다(박정기씨·고 박종철의 아버지).”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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