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3호, 덕흥리 고분 주인공은 누구?
[한겨레] 망명 중국관리로 알려졌지만 정체 미궁 속
전호태 교수, 고구려 옛 무덤 아카이브 위해
중국 집안권·북 평양권 고분 10기 집중조명
고구려 벽화고분
전호태 지음/돌베개·3만5000원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고구려 고분군 중에서 벽화가 발견된 무덤은 지금까지 121기가 넘는다. 이 분야 전문연구자인 전호태 울산대 교수의 <고구려 벽화고분>을 보면, 이들 중 38기가 중국 길림성 집안·환인·무순 지역(집안권)에, 83기는 북의 평양군과 황해도 안악군 주변(평양권)에 분포돼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벽화고분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지만, 고대 특정 시기(4~6세기) 세계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뛰어난 미술이자 건축물이 광범위한 지역에 이토록 많이 다채롭게 남은 예는 달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놀라운 유물들에 대한 연구는 재발굴된 지 100여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기초 조사와 발굴 보고 정리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고, 전문 연구자들은 아직도 “국내외를 통틀어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없으며, 유물들은 급속도로 훼손돼 가고 있다. 이를 바꾸고 제대로 된 연구와 보존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이 책은 집안권 3기, 평양권 7기, 모두 10기의 주요 벽화고분과 그 전반적 흐름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위해 각 고분의 구조와 벽화 내용을 하나하나 매우 세밀하게 살피고 측정하고 기존의 연구 성과들과 비교하면서 그 실체와 의미, 역사(시대)적·지역적 특징들을 때론 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정교하게 짚고 정리했다.
1500년 전인 6세기 이전 고구려와 동아시아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이 놀라운 유물들은 7세기 고구려 멸망과 함께 방치돼 도굴당하고 훼손된 채 잊혀졌다가 19세기 말 조선을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재발견돼 공개되기 시작했다.
일제 패망과 함께 고구려 고분벽화 발굴, 조사·연구는 북과 중국 학자들이 주도했고, 일본 연구자들은 멀어졌으며, 남쪽 연구자들은 냉전이 무너질 때까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듯 고구려 벽화고분이 100년 넘도록 제대로 조사·연구되지 못한 것은 식민지배와 남북 분단, 전쟁과 이념적 대립이 야기한 복잡한 정치현실 탓이 크다. 예컨대 일제 관학자들은 고구려 벽화고분에 감탄하면서도 독자성·주체성을 부정하고자 중국 쪽 영향의 흔적을 찾아내려 애썼다. 동북공정을 밀고 나간 중국 쪽은 또다른 의도를 갖고 있다. 남북분단은 고대사 발굴·연구마저도 철저히 분단시켰다. 내셔널리즘적 요구와는 무관하게, 역사적 사실 자체의 온전한 조망과 연구를 위해서도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다.
고구려 벽화고분들이 세계적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 중국의 동북공정이 야기한 고대사 논쟁,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계기가 됐다.
집안권 3기(통구사신총, 삼실총, 장천1호분), 평양권 7기(개마총, 진파리1호분, 덕흥리벽화분, 수산리벽화분, 쌍영총, 안악2호분, 안악3호분)의 고분들은 이 책에서 다시 시기별로 재분류된다. 중국 랴오양의 한나라, 위·진 시기의 벽화고분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면서 낙랑·대방의 벽돌무덤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당대 생활풍속 중심의 벽화를 남긴 초기(4세기~5세기 초) 안악3호분과 덕흥리벽화분. 불교의 영향과 그것의 고구려화 경향, 연꽃 그리기가 두드러지는 중기(5세기 중엽~후반, 6세기 초 고구려 전성기)의 안악2호분, 수산리벽화분, 쌍영총, 삼실총, 장천1호분. 그리고 사신도 일색의 후기(7세기 전후)의 개마총, 진파리1호분, 통구사신총.
1949년과 1957년에 북이 발굴한 안악3호분과 역시 북이 1976년에 발굴한 덕흥리벽화분은, 그 무덤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고구려가 지금의 베이징, 서쪽으로 시안까지 이어지는 ‘유주’ 지역을 지배했는지 여부가 갈릴 수 있다. 안악3호분 벽의 한문 글(묵서명)에 나오는 동수(冬壽)라는 인물이 당시 전연의 왕위계승 다툼에서 줄을 잘못 섰다가 고구려로 망명한 장군 ‘동(佟)수’와 동일인물이냐, 아니면 고구려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이냐는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덕흥리벽화분 묵서명에 나오는 유주자사 진(鎭)이라는 무덤 주인공이 고구려로 망명한 북중국 왕조의 관료였는지 고구려 출신 대귀족이었는지도 확정돼 있지 않다. 그들이 망명객이냐 아니냐, 그들의 직책이 망명 전 중국 것이냐 고구려 것이냐에 따라 고구려 영역이 요동칠 수 있다.
지은이는 최근 고구려 벽화고분 연구를 남쪽 학자들이 주도해왔다면서도 연구자는 여전히 소수이고 새로운 연구세대는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고구려 벽화고분들에 관한 정보 수집과 정리, 데이터베이스화, 보존조처, 이를 위한 국제적 연대와 기금 조성이 절실하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우병우 대신 이석수 수사하라니…‘적반하장’ 청와대
■ 이석수 “민정서 목 비틀어놨는지…” 청와대의 조직적 감찰방해 주장
■ 검찰 내부 “이석수 국기문란 프레임은 우병우 작품”
■ [화보] 고 김대중 대통령 서거 7주기 추도식
■ [화보] 전쟁을 찍고 평화를 새긴다
▶ 발랄한 전복을 꿈꾸는 정치 놀이터 [정치BAR]
▶ 콕콕 짚어주는 [한겨레 카드뉴스][사진으로 뉴스 따라잡기]
▶ 지금 여기 [사드 배치 논란][한겨레 그림판][당신에게 꼭 맞는 휴가지는?]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