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과학수사> ⑪ 핏자국이 말하는 범행 현장..혈흔 형태 분석

2016. 8. 13.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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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법칙에 기초..범행 당시 상황 재구성하는 핵심 단서 '이태원 살인사건' 진범 지목된 패터슨 기소에 결정적 역할
압력으로 혈액이 다량 분출된 비산혈흔의 모습 [서울지방경찰청 제공]

물리학 법칙에 기초…범행 당시 상황 재구성하는 핵심 단서

'이태원 살인사건' 진범 지목된 패터슨 기소에 결정적 역할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전국에 세찬 장맛비가 내린 다음 날이었다. 서울에도 시간당 30㎜가 넘는 호우가 쏟아진 뒤였다. 눅눅함이 공기를 가득 채운 7월2일 저녁, 서울 구로구 한 여인숙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중국 동포인 투숙객 A(67)씨는 베개를 벤 채 좁은 화장실 바닥에 피투성이로 누워 있었다. 양쪽 팔꿈치 안쪽 동맥이 베어졌고, 샤워기 아래에서 커터칼이 발견됐다. 바닥은 피로 흥건했고, 벽 곳곳에도 피가 흩뿌려진 상태였다.

A씨가 묵던 방은 어른 3명 정도가 붙어 누우면 잘 수 있을 만한 넓이였다. 밖에서 사 온 듯한 음식 쓰레기와 담배 등이 제멋대로 널려 있었다. 외부 침입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사망 원인은 과다출혈에 따른 저혈량 쇼크로 추정됐다.

언뜻 자살로 보이지만 타살일 개연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살인 사건이 자살로 위장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사라질 때까지는 타살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경찰 수사의 기본 원칙이다.

핏자국 가득한 현장이 뭔가 말해줄 것 같았다. 다음날 오전,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소속 혈흔 형태 분석 전문 수사관이 현장에 도착했다. A씨의 시신은 치워졌지만, 화장실 벽과 바닥의 핏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장에 남은 모든 혈흔이 조사 대상이었다. 수사관은 화장실을 A부터 F까지 6개 구역으로 나눴다. 각 구역의 핏자국 모양과 크기, 위치를 분석하면 혈액 분출이 시작된 지점과 원인, 당시 안에서 있었던 행위 등을 추정할 수 있다.

범죄든 자해든, 동맥이 손상됐다면 현장에 남은 혈흔은 분명 동맥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이번 사건처럼 신체 손상이 여러 번 있었다면 혈흔 위치는 갈수록 내려온다. 힘이 빠져 자세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위치의 혈흔은 휴지걸이가 있는 좌변기 쪽 벽면이었다. 흩뿌려진 혈흔은 약 147㎝ 높이에서 분출한 것으로 추정됐다. 타원형이었고, 최초로 벽에 닿았을 때의 모(母)혈흔과 이후 형성된 작은 자(子)혈흔이 함께 보였다.

계산 결과 충돌 각도는 44도였다. 동맥이 완전히 절단된 것이 아니라 일부 손상돼 피가 튀어나오고, 이 각도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피가 비산했다가 낙하하면서 벽과 충돌하면 이런 형태가 나온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화장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한 수건이 놓여 있었다. 일부분에만 피가 묻지 않았는데, 손으로 쥔 위치인 듯 보였다. 1차 출혈이 발생한 상황 직후 A씨가 심한 고통을 느껴 지혈을 시도했다는 뚜렷한 증거였다.

2차 출혈 흔적은 더 아래쪽에 있었고, 더 강렬했다. 출입문 왼쪽 벽면이었다. 추정되는 발혈 위치는 바닥 위 약 50㎝. 앉은 자세였다는 뜻이다. 동맥이 완전히 잘려 분수처럼 피가 뿜어진 흔적이 방사형으로 퍼져 있었다.

A씨는 몹시 고통스러워했음이 분명했다. 좌변기 아래와 바닥에는 혈액이 묻은 물체가 닿아 만들어지는 '묻힌 혈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혈액이 다량 몸에서 빠져나가 의식을 잃기까지 그는 계속 고통으로 몸부림쳤을 것이다.

수사관은 이런 흔적들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재구성했다.

A씨는 처음에는 선 채로 벽에 오른팔을 대고 자해를 시도했다. 고통이 컸던 나머지 잠시 주저하며 수건으로 오른팔을 지혈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시 돌려 왼팔을 강하게 그었다. 이후 피를 흘리며 여러 차례 뒤척이다 누운 채 숨졌다.

A씨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현장에 남은 혈흔은 그가 어떤 이유에서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보여줬다는 것이 수사관의 판단이었다. 수사관은 이런 분석 결과를 담당 형사에게 전달했다.

A씨에게는 한국에 체류하는 누나가 한 명 있었다. 함께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A씨는 숨지기 얼마 전 누나를 찾아가 "중풍이 생겼다"고 말했다. 사망 전날 진료가 예약돼 있었지만, 그는 연락을 끊고 병원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혈흔의 방향성 분석 [서울지방경찰청 제공]

◇ 물리학 법칙으로 형성되는 혈흔…크기·모양·위치로 사건 재구성

혈액은 인간 체중의 8%가량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큰 요소 가운데 하나다. 온몸에 분포한 혈관을 돌며 산소와 영양소를 운반하는 생명의 원천이다. 성인 남성 몸속에는 5∼6ℓ, 여성은 4∼5ℓ 정도의 혈액이 존재한다.

강력사건 현장에는 흔히 피가 낭자하다. 흉기에 찔리든, 둔기에 맞든, 인간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범죄는 종종 출혈을 동반한다. 피가 몸 밖으로 나와 흐른다는 것은 외부에서 어떤 힘이 작용했음을 의미한다.

혈흔 형태 분석은 범죄 현장에서 인체 밖으로 유출된 핏자국을 분석해 범행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는 기법이다. 앞서 구로구 사건에서 보듯, 혈흔 크기와 모양, 위치를 알면 피가 어디에서 시작해 어떻게 움직였는지 추정할 수 있다.

혈흔은 물리학 법칙에 따라 형성된다. 출혈이 발생해 피가 튀고 떨어지는 과정은 공기 저항, 중력, 외부의 힘 등에 영향을 받는다. 최소한 지구상에서 이 원칙을 무시하는 움직임은 없다. 혈흔을 통한 사건 재구성이 가능한 이유다.

이런 이유로 과학수사에서 다루는 혈흔은 출혈 발생 원인과 이후 혈액 움직임에 따라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국제 학계에서는 혈흔을 72가지로 분류하고, 이를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다소 줄긴 했으나 국내에서도 50종류로 나눈다.

혈흔을 형태로 분류하면 외력으로 혈액이 공기 중에 퍼져나가 벽 등에 부딪혀 형성되는 '비산혈흔'과 그렇지 않은 '비(非)비산혈흔'으로 나눈다. 이후 혈액의 움직임에 따라 어떤 혈흔이 형성되는지를 두고 형태를 세부적으로 정의한다.

형성 원인에 따라 분류하자면 중력의 영향으로 혈액이 떨어져 형성된 '낙하 혈흔', 피가 묻은 물체가 닿거나 혈흔이 다른 물체에 의해 닦이면서 형성되는 '옮긴 혈흔', 외력으로 출혈이 발생해 형성되는 혈흔 등으로 나뉜다.

혈액은 출혈 원인이 되는 외력이 클수록 작게 부서지는 경향이 있고, 혈액량이나 심장박동 등에도 영향을 받는다. 어느 부위에 어느 정도의 힘이 가해졌는지, 어떤 도구로 출혈을 일으켰는지 등에 따라 혈흔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총탄에 맞았다면 엄청난 힘이 일시에 작용하므로 미세한 핏방울이 흩뿌려지는 비산혈흔이 형성된다. 동맥이 파열되면 심장박동에 따라 많은 양의 혈액이 한꺼번에 분출하는 형태의 혈흔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범행에 쓰인 흉기에 혈액이 묻었다가 흉기를 휘두르는 과정에서 주변으로 튀면 '이탈 혈흔'이 생성된다. 현장에 튄 피가 이후 어떤 물체에 닦인 모습, 옷에 피가 스며든 형태 등도 모두 혈흔으로 분류돼 수사 단서로 활용된다.

이 때문에 혈흔 형태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룹화'다. 같은 원인으로 피가 분출했다면 그 결과 남은 핏자국들 사이에 공통점과 연관성이 발견된다. 이를 하나의 집단으로 묶으면 출혈 원인과 분출 과정을 역추적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현장에 남은 여러 종류의 혈흔을 종합하면, 범행 도구가 몇 차례 움직였는지, 출혈 이후 가해자와 피해자가 얼마간 어떤 동작을 했는지 등까지 추론할 수 있다. 핏자국만으로 범행 당시를 재구성하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혈흔 형태 분석에는 꽤 복잡한 작업이 필요하다. 혈흔이 온전한 원형인지, 타원형인지 등에 따라 형태와 방향성을 분류하고, 기하학적 분석을 통해 혈액의 충돌 각도와 출혈 시작 지점 좌표 등을 계산해야 한다.

이렇게 혈흔으로 범죄 상황을 재구성하면 수사에 큰 도움이 된다. 피의자가 혐의를 부인하거나 형량을 낮추려 범행을 일부 축소하려 들더라도, 현장에 남은 혈흔이 당시 상황을 시간 순서로까지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살인사건 등의 현장검증 과정에서 피의자가 현장과 맞지 않는 진술을 하더라도 오류나 거짓말을 지적하기가 쉽지 않았다. 혈흔 형태 분석 도입 후에는 현장에 남은 혈흔을 토대로 객관적 상황을 제시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런 객관성 덕분에 혈흔 형태 분석 결과는 여러 사건에서 법정 증거로 인정됐다. 물론 혈흔만으로 모든 상황을 재구성할 수는 없다. 상처 분위에 대한 법의학적 판단, 목격자 진술, 범행 도구 등 전체적인 현장 분석이 당연히 필요하다.

◇ 19년만에 뒤바뀐 '이태원 살인사건' 진범…혈흔 분석이 결정적

'이태원 살인사건' 진범으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아더 존 패터슨의 한국 송환 당시 모습. [연합뉴스 DB]

범죄 수사에서 혈흔 형태 분석의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19세기 후반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에서 시작됐고, 이후 혈액 충돌각도로 출혈 시작 부위를 계산하거나 혈흔 형태와 특징을 분류하는 등 연구가 이뤄져 왔다.

한국에서는 2008년 경찰청 과학수사센터에서 혈흔 형태 분석을 과학수사 기법으로 처음 도입했을 만큼 역사가 짧다. 그럼에도 여러 사건·사고 현장에서 혈흔 형태 분석이 유용한 수사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 혈흔 형태 분석 역사에서 기념비적 순간이라면 단연 '이태원 살인사건'을 꼽는다. 1997년 사건 발생 이후 19년 만에 진범으로 드러난 아더 존 패터슨(37)을 미국에서 데려와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1997년 4월 서울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대학생 조중필(당시 23세)씨가 흉기에 여러 차례 찔려 살해당한 사건이다.

그날 가게에 있던 재미동포 에드워드 리와 패터슨이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고, 항소심까지는 리가 범인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1998년 대법원은 증거 불충분으로 리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후 검찰은 패터슨을 진범으로 보고 재수사에 착수했으나 그는 이미 미국으로 떠난 뒤였다. 법무부는 패터슨의 소재를 파악해 미국 측에 범죄인 인도를 청구했다. 그 사이 한국에 혈흔 형태 분석이라는 새로운 수사기법이 도입됐다.

검찰은 당시 경찰청에 의뢰해 당시 사진과 수사기록을 제공하고 혈흔 형태 분석을 맡겼다. 현장 혈흔을 실측할 방법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진과 기록을 토대로 혈흔을 분석한 결과 패터슨의 혐의를 입증할 결론이 나왔다.

당시 조씨가 흉기에 찔려 목 동맥이 절단되면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이어 그가 반시계방향으로 돌아서는 과정에서 출혈이 계속됐다. 이 혈흔은 소변기 우측 벽면과 세면대 거울에 남아 있었다.

이렇게 다량의 피가 분출했음을 고려하면 가해자에게도 피가 많이 묻었을 것임은 당연한 추론이었다. 사건 당시 패터슨이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뒤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증언과 일치하는 분석 결과였다.

검찰은 이 분석 결과를 토대로 2011년 12월 패터슨을 기소했다. 경찰의 혈흔 형태 분석 결과서는 영어로 번역돼 미국 법원에까지 제출됐다. 결국 패터슨은 지난해 9월 국내로 송환돼 법정에 서게 됐다.

재판 과정에서도 혈흔은 주된 쟁점이었다. 분석을 담당한 경찰청 수사관은 3차례나 증인으로 출석했다. 분석 결과만 놓고 8시간씩 증인 신문이 진행되곤 했다. 검찰과 변호인은 매번 40개가 넘는 질문을 쏟아내며 공방을 벌였다.

올해 1월 29일. 1심은 패터슨을 조씨 살해범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가 인정한 증거 목록에는 경찰청의 혈흔 형태 분석 결과서가 포함됐다. 패터슨은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했고,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puls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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