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 Topic]천재는 얄미워!.. 어느 피해자의 고백

2016. 8. 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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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의 종횡무진 시간기행(14)
[동아닷컴]
미성(美聲)의 테너 성악가이던 한국인 P씨는 험상궂은 얼굴 때문에 오페라에 캐스팅되기가 어려웠다. 분장으로 이를 감추려 해도 한계가 있었다. 유럽무대에서는 덩치가 작은 동양인이라는 약점도 작용했다. 노래를 아무리 잘 불러도 주역으로 나서기 곤란했다. 조역 또는 단역으로도 부적절했다. 가창력이 너무 좋아 주역 테너를 망신시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객원 지휘를 맡은 거장(巨匠) 주빈 메타 선생이 조역인 P씨의 노래를 듣고 극찬하며 음악감독에게 “주역 더블 캐스팅으로 연습시키면 좋겠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P씨는 세계적인 마에스트로에게서 이런 평가를 받고 가슴이 부풀었지만 끝내 유럽 무대에서 주역을 맡지는 못했다. 물론 한국 무대에서는 여러 번 주인공으로 섰다.
한국을 떠나 이탈리아에 올 때는 세계 최고의 벨칸토 테너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노래 실력만큼은 자신 있었다. P씨는 유럽의 여러 유수한 콩쿠르를 석권하면서 ‘차세대 파바로티’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한국 신문에는 큼직한 얼굴 사진과 함께 이런 식의 소개 기사가 자주 실렸다.
그러나 노래, 연기력, 외모 등 오페라 주역이 필요로 하는 모든 면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인 어느 테너를 만나고 P씨는 야코가 완전히 죽었다. 이것이 P씨가 무대를 떠난 결정적인 이유이다.
P씨가 이탈리아 무대에서 조역급으로 활동할 무렵인 2007년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된 도니제티의 오페라 ‘연대의 딸’을 보러간 것이 화근이었다. 그날 주인공 토니오 역으로 출연한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Juan Diego Flrez)의 맑고 힘찬 고음(高音)을 듣고는 감탄에 몸을 들썩였고 질투에 치를 떨었다. 아홉 번의 하이C 음을 내야 하는 난곡 아리아 ‘친구들이여, 오늘은 기쁜 날(Ah! Mes amis)’을 플로레스는 물 흐르듯 수월하게 불렀다. P씨 자신은 눈알을 부라리며 용을 써야 그 고음을 낼 수 있다.
초절기교의 콜로라투라 창법, 중음에서 고음으로 바뀌는 파사지오(Passaggio)의 매끄러움, 청중을 매료시키는 감정 표현 등 나무랄 곳 없는 완벽한 노래였다. 그 아리아가 끝난 후 청중의 우레와 같은 갈채가 극장을 흔들었다. 박수소리가 한없이 길어졌다. 오죽하면 지휘자가 응급조처로 같은 아리아를 다시 부르게 했을까. 플로레스의 ‘기생 오래비’ 같이 잘 생긴 얼굴도 P씨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하필 나이도 1973년생으로 동갑이었다.
그날 혼자 사는 숙소에 돌아온 P씨는 플로레스의 음반을 틀어 다른 노래를 들어봤다. “아! 플로레스는 천재인가, 괴물인가?”그렇게 중얼거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플로레스는 하이C와 하이D를 넘어 하이E 플랫까지도 무난하게 소화하지 않으냐. P씨는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 등 이른 바 ‘세계 3대 테너’의 합동 공연 비디오를 볼 때면 이들의 관자놀이와 목 울대 부근의 핏대를 유심히 살핀다. 하이C를 토할 때 파바로티의 핏대는 별 변화가 없는데 원래 바리톤 출신인 도밍고와 암 투병에서 일어난 카레라스는 핏대를 솟구치며 용을 쓰는 모습이다. 플로레스는 ‘20세기 최고의 테너’인 파바로티와 엇비슷했다.
P씨는 모차르트를 질시(嫉視)한 살리에리의 심경을 이해할 것 같았다. 우사인 볼트와 동시대(同時代)를 살아가는 스프린터의 심정도 이렇겠지? 타이거 우즈의 전성기에 필드에 나선 프로 골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P씨는 그날 충격을 받은 탓인지 가사를 잊는 버릇이 생겼다. 리허설에서 몇 차례 가사를 깜박하고 어버버 하는 말로 둘러대는 실수를 저질러 본 공연에 출연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 결국 플로레스 때문에 노래를 접은 셈이 된다.
무대를 떠난 P씨는 로마에서 한국 식당을 열었고 자그마한 이 식당이 그럭저럭 돌아가자 일찌감치 은퇴한 것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플로레스는 이제 ‘벨칸토 테너의 제왕’이라 불린다. ‘내가 지금까지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다면 플로레스에 대한 콤플렉스, 질투심 때문에 인격이 파탄되지 않았겠는가?’
2013년 로시니의 고향 페사로에서 열린 로시니 축제에서 플로레스가 로시니의 마지막 역작이자 노래하기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빌헬름 텔’의 1829년 파리 초연판 무삭제본 공연에 나온다기에 P씨는 일부러 그곳까지 가서 관람했다. 테너 주역 아르놀트 멜히탈 역은 전성기의 파바로티도 스튜디오 녹음만 남겼을 뿐 성대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실연(實演)을 거절했던 ‘공포의 배역’이었다. 과연 ‘천상(天上)의 테너’ 플로레스였다. 윤기 나는 고음과 매끄러운 레가토로 54회의 하이B와 19회의 하이C를 눈부신 레이저 빔처럼 토해냈다.
P씨는 이튿날 오전 페사로 시내에 있는 로시니 생가를 방문했다. 로시니의 육필 악보를 구경하며 관리인에게서 설명을 들었다. “로시니는 10세 때부터 오페라를 작곡한 천재랍니다.”
‘천재’라는 단어가 들리자 P씨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로시니 주변의 얼마나 많은 준재, 수재들이 로시니의 재능 앞에 무릎을 꿇고 좌절감에 빠졌을까.
플로레스는 사생활도 깔끔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도밍고와 함께 유엔 친선대사로 임명된 그는 현재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엘 시스테마’ 운동의 페루 지역 유소년 오케스트라의 대표로 활동하기도 한다.“이 친구, 언론 인터뷰 때 겸손하기까지 하네!‘P씨는 어느 신문을 읽고 이렇게 느꼈다. 플로레스가 기자에게 한 말이 귀에 맴돈다. “제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최선에 아직 이르지 못했습니다. 완벽에 이르기 위해 구도(求道)하는 자세로 스스로를 단련시킵니다. 다른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으며 그들에게서 배우는 걸 좋아하기도 합니다.” 테니스도 잘 치고 가정에도 충실하다 하니 부럽고 샘난다!
P씨는 주방에서 이런 추억에 젖어 숙주나물을 무치고 해물전도 부친다. 유학 초기 한국 식당 주방에서 ‘알바’로 한국요리를 배울 때만 해도 자신이 식당을 경영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산채비빔밥 세 개요!”종업원 아가씨 소피아의 목소리가 경쾌하다. 오후 9시니 마지막 주문인 셈이다. 홀 쪽을 얼핏 보니 서양인 남녀 부부와 아기, 피부색이 가무잡잡한 인도풍 남자가 앉아 있다. 저 사람들이 한국의 비빔밥 맛을 알고 주문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며 도자기 그릇에 취나물, 고사리, 고비, 도라지, 더덕 등을 담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소피아가 손님들의 신상에 대해 스치듯 말했다.“두어 달 전부터 저분들은 단골이 되었어요. 한 분은 조상이 코레아 사람이라는군요. 성씨(姓氏)는 코레아….”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손님이다. P씨는 반가운 마음에서 남은 녹두가루를 반죽해서 빈대떡 2개를 부쳐 그 손님들에게 한국식 ‘써비스’로 제공했다. 곧 소피아가 종종걸음으로 주방에 왔다.“손님들이 쉐프를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하시네요.”P씨도 무료한 참에 이런 상황을 은근히 기대했다.
“한국음식이 참 맛있군요. 제 DNA가 한국음식을 그리워하나 봅니다. 저는 안토니오 코레아입니다.”
“임진왜란 직후 이탈리아에 온 조선인의 후예이지요?”P씨는 코레아 씨의 부인과도 인사를 나누고 잠든 아기도 안아보았다.“몇 달 전에 코레아에 다녀왔는데 조상 나라여서 그런지 내내 마음이 푸근하더군요.”
코레아 씨는 감동을 다시 기억하려는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말했다.
그는 동석(同席)한 40대 신사를 소개했다.“제 친구인 메흐타 대표입니다. 음악기획가이죠.”코레아 씨와 메흐타 대표는 모두 음악공연 사업가라 했다. P씨는 음악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노래판을 떠나 식당을 경영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싫기 때문이다그러나 소피아가 철딱서니 없이 발설하고 말았다.“저희 사장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나오셨답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무대에도 선 실력파 테너이시지요.”“다 옛날이야기입니다만….”
P씨가 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아기가 잠에서 깨어 울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지 울음이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아앙! 아앙…”아기 엄마는 당황해서 아기를 얼러 울음을 멈추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럴수록 아기는 더욱 자지러지게 울었다.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P씨에겐 이명(耳鳴)처럼 들려왔다. 심연(深淵)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문득 그 울음은 P씨 자신의 목에서 울려나오는 듯했다. P씨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아기가 되어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듯했다. 엄마의 자장가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 울음소리가 그쳤다. P씨가 눈을 떠보니 아기는 새근새근 숨을 쉬며 잠들어 있었다.“이 아름다운 노래… 한국의 자장가입니까?”P씨가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부른 모양이었다. 메흐타 대표는 물기 어린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예. 제가 태어나 처음 들은 노래….”“선계(仙界)에서나 들을 수 있는 노래입니다. 무대를 떠나셨다니 무척 안타깝군요. 언젠가 꼭 컴백하십시오.”
메흐타 대표는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P씨에게 건네주었다. 며칠 후 로마 콜로세움에서 열리는 ‘콜로세움 복원(復元) 기념음악회’ 입장권 몇 장이 들어있었다.“그날 주빈 메흐타 지휘로 라 스칼라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공연합니다. 와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주빈 메타 선생님이 오신다구요? 아… 저를 무척 아껴주신 분인데….”“아, 그래요? 저희 집안 아저씨입니다. 서방에서는 ‘메타’라 하지만 고향 인도에서는 메흐타(Mehta)라고 부르지요. 메흐타 가문은 음악 명문가입니다. 주빈 메흐타 아저씨의 아버지인 메리 메흐타 선생도 뭄바이 교향악단 지휘자로 활약하셨답니다.”
2016년 7월 1일 저녁 콜로세움에 간 P씨는 공연 전에 악단 연습장으로 들어갔다. 단원들은 리허설에 열중이었다. 잠시의 휴식 시간에 몇몇 낯익은 단원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감히 주빈 메타 선생에게는 다가가지 못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니 팔순 연세인데도 여전히 정정했다.
오후 8시 30분, 2000년간의 묵은 때를 벗고 깨끗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콜로세움 내부에는 휘황한 빨강, 초록의 화려한 조명이 비치는 가운데 공연이 시작됐다. 테너 파비오 사르토리, 소프라노 페데리카 롬바르디 등 이탈리아의 젊은 성악가들이 부르는 오페라 아리아를 들으니 P씨는 자신이 무대에 선 듯한 착각이 든다.
P씨 옆에 나란히 앉아 공연을 관람한 소피아와 그녀의 남자친구 무기고(Mughigo)는 앙코르 노래인 ‘라 트라비아타’의 ‘축배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우레와 같은 갈채 속에 공연이 끝났다. P씨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상념에 잠겼다. 며칠 후 P씨의 식당에 한국에서 온 ‘먹방’ 방송팀이 들이닥쳤다. 여성 연예인 2명과 스태프 4명이 몰려온 것이다. Y감독이라는 책임 PD가 P씨에게 말문을 열었다.“세계 각국의 한국 식당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음식 한류를 조성하기 위한 프로젝트이지요. 로마에서 섭외한 식당에서 촬영을 하긴 했는데 너무 밋밋했답니다. 밀라노로 떠나려는데 마침 이 식당이 눈에 띄어 무작정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촬영하면 어떨까요?”“저희 집은 더 밋밋할 텐데요. 식당 크기도 콧구멍만 하고….”
“들어오자마자 인상적인 것은 종업원 아가씨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한다는 점입니다!”Y감독은 소피아를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요?”“이 아가씨를 출연시키고 싶어서요.”
소피아는 이 대화를 듣고 P씨에게 사정했다.“사장님, 저 한국 방송에 나가고 싶어요. 허락해주세요.”
P씨는 난처했다. 소피아의 청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소개될까봐 두려웠다. 잠시 고민하다 Y감독에게 제안했다.“제 얼굴을 촬영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지켜주시면 좋습니다.”“이탈리아 아가씨가 한국음식에 반해서 한국어도 열심히 배우게 됐다…는 콘셉트로 진행하겠습니다.” “소피아가 꼭 그래서 한국어를 배운 건 아닙니다만….”“요즘 스토리텔링이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스토리를 좀 꾸미려 하니 이해해주세요.”“스토리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소피아의 남자친구를 불러 함께 촬영하시면 더 좋겠는데요. 그 친구는 경상도 사투리가 특기랍니다.”“예? 좋습니다! 소피아 님, 지금 남친분 여기로 얼른 오라고 연락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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