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같던 '고등학생 운동'의 추억
‘고운’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형용사도, 사람 이름도 아니다. ‘고등학생 운동’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1960년 4·19 때 이야기냐고? 아니, 그보다 훨씬 뒤 1987년 민주화 이후 존재했던 말이다. 흔히 ‘고운 세대’라고 불렸다.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때 그 고교생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변혁운동의 바람이 우리 사회에 몰아쳤다. 대학생·노동자 가릴 것 없이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 기운은 입시 지옥에서 시달리던 고교생도 비껴가지 않았다.
교사들이 먼저 움직였다. 1989년 ‘참교육’을 깃발로 내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되면서 학교가 들끓기 시작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교사의 노동조합 가입이 불법이라며 전교조 교사 1500여 명을 해직하는 초강수를 둔다. 전교조 가입 교사 대다수는 학생들에게 신망받는 이들이었다. 아침까지 교실에서 얼굴을 마주했던 담임교사가 교장·교감·학생부장 등에게 떠밀려 교문 밖으로 쫓겨나는 모습을 목격한 학생들은 경악했다. 유례를 찾기 힘든 고교생 집단행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수업을 거부하고,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운동장에서 연좌 농성을 벌였다. 전국 250여 개 학교에서 항의 시위에 참여한 고교생이 연인원 47만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당시 고교생 활동가들은 스스로를 ‘참교육 1세대’라 부르며 자신들의 활동을 ‘학생운동’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학내에서 비밀 소모임을 결성해 사회과학 서적을 ‘학습’하고, '자율학습을 폐지하고 전교조를 합법화하라'는 유인물을 돌렸다. 이때 상당수 ‘고운 활동가’의 의식 수준은 대학생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정부 당국과 학교는 ‘문제 학생 색출’에 골몰했다. 학교 당국 고발로 수사가 시작되면서 학생들의 구속까지 이어졌다. 당시 전교조 학생사업국에 따르면 1989년 한 해 동안 ‘고교생 징계 현황’은 구속 기소 5명, 불구속 기소 10명, 퇴학 7명, 무기정학 28명, 유기정학 40명, 근신 72명에 달했다. 학교 측의 제재로 징계 학생이 속출하자, 그해 11월 고교생 200여 명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단식 농성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것은 통계의 일부일 뿐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고등학생 운동’ 기간에 얼마나 많은 학생 징계가 이루어졌는지는 제대로 된 통계조차 찾기 어렵다. 전교조 교사들이 대규모로 해직된 이후 학교 측의 압박이 더욱 노골화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징계자 수는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1990년에는 대구 경화여고에서 전교조 지지 시위를 주도했던 김수경양(학생회 총무부장)이 교사들의 폭언·폭행에 시달리다 투신자살하기도 했다.
1991년 5월 투쟁의 한복판에도 고교생이 있었다.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백골단(경찰의 진압·체포 부대)의 쇠파이프 폭행으로 사망하면서 촉발된 그해 5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이들 가운데 적잖은 고교생이 있었다. 고교생의 조직적인 거리시위 참여가 사회적 논란이 되면서 일선 학교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1991년 5월은 ‘분신 정국’이기도 했다. 학생·노동자·시민이 스스로 몸을 불살라 정권의 폭압에 항거했다. 당시 분신자살한 대학생(전남대 박승희, 안동대 김영균, 경원대 천세용)의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각각 목포 정명여고, 서울 대원고, 서울 동북고에서 활동한 ‘고운’ 출신이었다. 당시 고교생 신분으로 분신한 김철수(광주 보성고)는 '쥐꼬리만 한 명예와 권력을 위해 공부벌레가 되어주길 바라는 기성세대와 분노의 가슴을 잃어버린 우리 학도를 깨우치기 위함이다'라는 유서를 남기기도 했다.
분노와 슬픔으로 뒤범벅이던 5월 정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외국어대 학생들의 정원식 국무총리 폭행 사건으로 정국이 차갑게 식으면서 한국 사회의 변혁운동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고교생 운동도 이 흐름과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1994년에는 공안 당국에 의해 ‘고교생 주사파조직 사건(‘샘’ 사건)’까지 터지면서 고운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후 고교생 운동은 두발 자유화 등을 기치로 내건 청소년 인권운동으로 흐름이 바뀌어갔다.
그 많던 ‘고운’ 출신 다 어디 갔을까
‘그때 그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고운 출신 상당수는 대학 진학을 거부했다. 제도 교육에 순응하는 대신 노동현장에 투신하겠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깨쳤든, 온몸을 바쳐 사회운동에 헌신했든 사회적 잣대로 보면 이들은 그저 ‘평범한 고졸자’였다. 1987년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연합(서고련) 결성에 참여했던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처럼 건설현장 노동자나 식당 종업원으로 20대를 맞이한 이도 있었다.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릴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고운의 주역 가운데 일부는 방황의 길로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고교 3학년 때 전교조 사태로 구속됐고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6개월 징역 살고 나와서 나는 거의 공황 상태였다. 친구들은 대학에 갔고, 고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시들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어린 시절의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참여가 내 실존을 파괴해버렸다. 그 이후 4년 동안 검정고시 준비를 해서 대학에 들어갔다. 신입생 때 다시는 5·18 광장에 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고운 활동가 출신으로 한총련 5기 의장까지 한 강위원씨 말이다. 그는 현재 농촌 복지 공동체인 여민동락공동체를 이끌면서 지역에서 촉망받는 시민운동가로 활동 중이다.
긴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바뀌었다. 혁명의 노래가 그친 대신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해직 교사들은 다시 교단으로 돌아왔고 전교조도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정부 조직도 생겨났다. 그러나 열병과도 같았던 고교생 운동의 기록은 제대로 남지 않았다.
고운의 기록을 찾아 헤맨 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운 출신인 양돌규씨(인문사회과학 서점 레드북스 대표)가 2006년 성공회대 석사 논문으로 ‘민주주의 이행기 고등학생 운동의 전개 과정과 성격에 관한 연구’를 발표한 것이 첫걸음이었다. 이후 병역 거부자 유윤종씨, 청소년 인권활동가 전누리씨 등 그 ‘뒷세대’에 의해 1990년 전후의 고교생 운동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들의 기록 등에 따르면 나경채 정의당 공동대표, 박용진 국회의원, 안진걸 참여연대 공동사무처장, 안수찬 <한겨레21> 편집장, 최병천 전 국회의원 보좌관, 홍기표 전 민주노동당 당직자, 황순주 경기창작센터 기획사업부장 등이 고운 출신 인사다. 이들은 어느덧 40대가 되었다. 벌써 고교생 자녀를 둔 이도 있다.
기성세대가 되어 기억을 은폐한 채 살아온 이들에게 두 권의 책이 말을 걸어왔다. 먼저 말을 건 것은 2014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한 하명희 작가의 <나무에게서 온 편지>다. 1991년 5월 정국에 참여했던 고교생의 이야기를 다룬, 아마도 최초의 문학작품일 것이다. 하명희 작가는 왜 그때 이야기를 끄집어냈을까. 1991년 당시 서울 계성여고 3학년이던 하 작가는 전태일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우리들이 바꾸려 했던 현실의 문제들은 지금 광화문광장에서도 여전히 배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했으며, 지금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당시 해직됐던 전교조 선생님들도 복권이 되었는데, 그때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왜 아무도 그들의 삶을 물어주지 않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최근 또 한 권이 나왔다. ‘과자 장수’가 책을 펴냈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는 <나는 언제나 술래>다. 저자인 박명균씨는 경기 북부에서 문구점·슈퍼마켓 등에 과자를 납품하는 사람이다. 언론에서는 ‘19년차 과자 장수’가 펴낸 에세이집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미 고교 시절 <불량제품들이 부르는 희망노래>(1989), <친구야 세상이 희망차 보인다>(1990)와 같은 책을 펴낸 글쟁이다. 서울 명덕고 재학 시절 문예반 활동을 통해 학내 민주화 싸움을 하다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한 고운 활동가였다.
'괜찮아, 우리는 늘 술래였잖아'
흥미로운 건 <나는 언제나 술래>가 하명희 작가의 <나무에게서 온 편지>에 대한 ‘화답’으로 나왔다는 점이다. <나무에게서 온 편지>가 드러내는 고운 세대의 불우함과 쓸쓸함에 대해 '괜찮아, 우리는 늘 술래였잖아'라며 토닥여준다(38~39쪽 대담 기사 참조).
그동안 ‘고운’은 금기어 같은 신세였다. 무엇보다 당사자들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온몸을 던져 저항했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이었으리라. 하명희와 박명균 두 작가는 그들이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게끔 용기를 주었다. 두 작가의 책 출간 이후 같은 기억을 공유한 이들의 화답도 SNS 등에서 줄을 잇고 있다.
지금 그 이야기를 되짚는 것이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신은 시위대에 박수나 쳐주던 평범한 고교생이었다고 밝힌 안진걸 참여연대 공동사무처장은 '한때 스스로를 던졌던 수많은 이들에게 소중한 기억을 되찾아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한 국회의원 비서관은 '과거를 지운 채 각개격파로 살아왔던 이들이 입을 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에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은 '침묵하며 살아온 우리 세대가 입을 연다면 세상을 향해 어떤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고민된다'라고 말했다.
너무 거창한 이야기는 필요치 않은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두 작가는 그때 그 친구들에게 안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아프지 않았냐고, 나도 아팠다고. 창문을 열고 작은 종이비행기 하나 옛 학교 운동장에 날려 보냈을 뿐이다. 옛날에 그랬듯 옆 반의 누군가도 창문을 열고 또 다른 종이비행기를 날려주기를 기다리면서.
이오성 기자 /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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